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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Jul 16. 2021

낀세대를 살고 있는 많은 '나'들에게

70년대 초, 중반에 태어나 사회 속에 있는 '나'들에게

70년대 초, 중반에 태어나서 사회에 나선 대부분의 직장인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낀세대로 살아간다. 윗세대는 컴퓨터를 못해서 아랫사람에게 시키고, 아랫사람은 수기로 하는 일을 못해 윗사람이 해야 하는 낀세대. 윗세대는 규제의 자유로움으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비용을 털며 아랫사람에게 꼰대 노릇을 할 수 있었으나 낀세대들은 전산화된 시스템으로 10원짜리 하나까지 시군구의 제재를 받으며 감시 속에 살아가고 윗사람의 업무를 떠안는다. 아랫사람은 자기주장을 가감 없이 표현하고 부당함을 참지 않으며 원치 않는 업무가 주어지면 과감히 사표를 던지므로 아랫사람이라 해서 함부로 업무를 주거나 말을 해서도 안된다.




1993년 김영삼 정부(金泳三 政府, 1993년 ~ 1998년 / 대한민국의 제6공화국의 두 번째 정부이다)가 들어서면서 맞벌이 가정을 위한 유아교육기관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지키기 위해 전국적으로 어린이집의 개소수를 늘리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기대와 달리 기관 설립 조건을 갖춘 교사들이 부족했고, 비영리사업에 쉽사리 뛰어드는 자본가도 드물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는 어린이집을 하고 싶다고 하셨고 나는 어머니의 꿈을 이뤄드리기 위해 내 꿈을 접고 어린이집을 설립에 동의했다.

 [1995년 4월. 52인 이하의 민간어린이집 설립]

주택을 개조해서 설립한 어린이집은 21살의 내가 감당하기에 벅찰 수도 있는 규모의 어린이집이었다.


개원 첫 달 8명의 원아로 시작했다. 한 명, 한 명의 원아의 입소가 기다려지는 나날, 원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기대하며 출근을 했다. 하지만, 어린이집을 설립한 후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어린이집이 뭐 하는 곳이에요?"

"혹시 놀이방이에요?"

"혹시 탁아소인가요?"

였다. 사람들에게 [어린이집]이라는 상호는 낯설고 못 미더웠나 보다. 그렇게 방문한 사람들은 대부분 입소하지 않고 궁금한 질문들만 하고 돌아섰다. 나는 목표를 세웠다.


"10년 안에 유치원보다 어린이집이 더 낫다는 인식을 만들고 말겠다."



어린이집은 아이들의 연령이 각각이라 교육도 운영도 어려웠다. 욕심은 있어서 원생 수가 8명인데 2개 연령을 묶어 3개 반을 만들었고 3명의 교사를 채용했다. 교사 인건비 만으로도 이미 마이너스 구조였다. 운영비를 절약하기 위해 조리사, 교사, 차량 운행, 행정, 원장... 1인 3역, 5역을 해 가며 원을 이끌어갔다.


교사 연수를 하며 몇 가지 원칙을 주었다.

1. 아이들을 내 아이 돌보듯 진심으로 대할 것

2. 수업 준비는 철저히 하고 재료를 아끼지 말 것

3. 아이들 급간식은 풍성하게 줄 것

4. 아이와 학부모의 낯을 빨리 익히고 기호를 파악할 것

5. 학부모에게 예의를 갖추되 교사로서의 품위를 손상하지 말 것


나는 아이들과 학부모, 교사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노력의 결과 반년이 채 안되어 정원을 채웠고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덕분에 어린이집과 붙은 구옥을 사서 벽간 벽 사이에 문을 내어 교실 수를 늘렸고 5년도 되지 않아 네 채의 집을 연결 해 어린이집을 확장했다. 아이들을 위한 실내 놀이터도 생겼고, 원장실, 교사연구실 등이 꾸려지고 기관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하지만 어린이집의 규모가 커졌다고 운영이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작으면 작은대로 크면 큰대로 규모만큼의 비용이 발생하고 잉여자금의 규모는 비슷했다.


1996년 김영삼 정부는 어린이집 개소수를 확대하려고 했으나 원장 자격을 갖춘 교사가 턱없이 부족한 것의 보완책으로 [한시적 조건부 인가 조치] 조건을 달아 3년 이상 같은 원에 근무하는 조건으로 전국에서 인가정원 50인 이상의 원을 운영하고 있는 60명의 운영자들에게 6개월 간 교육을 하고 시설장(원장의 명칭은 유치원연합회에서 사용권을 거부하여 어린이집은 원장을 시설장이라고 명칭함) 자격을 부여했다. 나는 조건에 부합하여 연수를 받고 대한민국 어린이집 제1호 시설장이 되었다.


어린이집에서의 하루는 전쟁의 연속이다. 비용 절감을 위해 여러 역할을 하고 있는 나는

새벽 5시에 출근해서 아이들의 아침 간식(영양죽), 점심(밥, 국, 반찬 3종) 준비를 했다. 오전 7시 40분부터 9시 50분까지 차량 운행, 10시부터 2시까지 6,7세 반 수업, 2시부터는 아이들 낮잠 재우고 오후 간식 준비, 3시 30분부터 저녁 7시 30분까지 종일반 수업, 7시 30분부터 마감될 때까지 원장 행정업무와 수업 준비를 했다. 퇴근시간은 평균 늦은 밤 11시 이후이거나 원에서 날을 새는 날이 거반이었다.




어린이집의 업무는 행정일은 전산시스템으로, 아이들의 수업 준비는 수기로 만드는 것이 태반이다. 비슷한 연배의 교사들은 수기로 교구를 만들거나 주변정리를 잘하지만 컴퓨터 업무에 미숙하고, 80년대 이후 교사들은 컴퓨터 업무는 비교적 수행하나 아이들을 위해 교구를 만들거나 새로운 수업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것을 꺼렸다. 일명 잡무 금지!


윗세대 원장들은 원을 꾸리며 부도 함께 키웠으나 낀세대인 나는 위에서 치이고 아래에서 까이는 말하기도 짠한 원장으로 살아간다. 하루하루 따박따박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낀세대로 살다가 반 백 년의 나이를 맞이하는 나는 오늘도 어제처럼 열심히 살아본다. 20대, 30대를 쉴 새 없이 살다 보니 '가만히 못 있는 병'에 걸렸다. 어쩌다 하루 정도는 소파에 누워 핫한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는데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림을 그리고, 뜨개질을 하기도 하며, 수를 놓거나, 그도 아니면 빨래라도 개켜야 한다. 이런 나를 보며 딸아이는 '휴식도 더 나은 삶을 위해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어른 스런 조언을 한다. 반평생 열심히 일한 몸에게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 맞다. 알면서도 못하는 것을 보니 '병'인 것도 맞는 듯하다.




아이들을 케어하기 위해 쉬고 있다. 코로나로 일상이 멈춰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이 시간을 여유롭게 즐겨도 좋으련만 나는 [글쓰기]를 자처했다. 그것도 매일 쓰기! 무모하다고 생각했던 그 일을 매일 해내고 있다. 글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하며, 수정하고 또 수정해 보지만 하루 이틀 지나고 다시 읽어보면 영 볼품없거나 낯이 뜨거워지는 졸작으로 느껴질 때가 더 많다. 그래도 오늘 또 글을 쓴다. 쓰다 보면 성장할 거라 믿고 쓰고 또 쓴다.


나는 글쟁이로 살고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




사진출처: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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