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에 만난 그와의 첫 데이트 장소는 남산이었습니다. 퇴근 후 나를 기다리는 그가 저 멀리 반짝이며 서 있던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 저 편에 남아있죠. 남산 밑 주차장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도, 두 손 가득 땀이 차도 괜찮았던 그날, 한 시간은 족히 걸렸을 그 길 마저 아름답게 느껴졌던 그때도 이맘때였던 것 같습니다. 청춘은 좀 그렇잖아요. 의욕과 열정은 가득 하나 가난하고, 힘없고, 시간은 많고...
해가 뉘엿뉘엿 어스름히 넘어가고 주변 수풀에 쌓인 눈은 풍경이랄 것도 없이 그저 얼음덩이가 되어 뭉쳐져 있었지만 그 조차 아름다워 보였던 남산의 언덕길... 이제 갓 사랑이 싹튼 남녀의 맞잡은 두 손과 사랑을 가득 담은 눈길만으로도 수풀 속 얼음덩이를 녹일 듯 훈훈했던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둘레길을 돌고 돌아 남산타워에 다다르니 해는 이미 뚝 떨어져 캄캄한 어둠만 우리를 감싸고 있었어요. 남산타워를 둘러싼 노점들(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은 다닥다닥 백열등을 밝혀가며 손님을 부르고, 이제 갓 데이트를 시작한 연인의 시선을 사로잡는 놀거리(사격, 풍선 터트리기, 설탕과자 뽑기 등)는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죠. 그는 사격을 선택하며 자신만만한 눈빛을 보냈어요. 숨을 멈추고 집중 한 그의 모습이 얼마나 멋졌는지 몰라요. 진지한 그의 부동자세에서 활활 타는 불꽃이 보이는 듯했어요. 그리고 그는 30발을 다 맞췄죠. 얼마나 놀랍고 신기했는지 모릅니다. 사격마저도 잘하는 남자라니... 선물로 진열된 커다란 인형을 받을 줄 알고 설렜던 그 짧은 찰나가 지나고 고작 열쇠고리 하나를 안겨주었을 때의 그 황당함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커다란 인형을 받으려면 300발 정도는 실수 없이 맞춰야 한다나요? 쥔장에게 '이런 얕은 술수로 사람을 농락하다니!!'라고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었지만 꾹 참았어요. 첫 데이트잖아요.
"사격을 정말 잘하시네요."
"군대에서도 사격으로 포상휴가를 나올 정도였죠. ㅎㅎ"
자랑마저도 밉지 않던 그에게 고맙단 인사를 건넨 후 남산타워 전망대 관람을 한 것이 남산에 대한 첫 기억입니다.
사실 속으로는 빙글빙글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고 싶었고, 남산 케이블카도 타고 싶었어요. 그런데 차마 그러자고 이야기하지 못했죠. 비쌀 것 같았거든요. 어쩌면 하자고 했으면 해 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 낯을 익히는 때이기도 하고,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아서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고이 접어 담았지만 이후 내내 아쉬웠어요.
세월이 흘러 가정을 이뤘고, TV에서라도 남산이 보이면 '케이블카 타러 가자!'라고 졸랐습니다. '당신도 참 대단해. 케이블카 그게 뭐라고... 꼭 나랑 타야겠어??'라고 했죠. 물론 혼자도 탈 수 있고, 친구나 아이들을 데리고 타도 되죠. 그런데 왜 꼭 남편에게 케이블카를 태워달라고 하느냐고요? 음... 글쎄요. 관심받고 싶은 걸까요?
처음에는 지나가는 말로 한 번 얘기를 꺼냈을 뿐인데, '쓸데없이 비싸기만 하지 막상 타보면 재미도 없고 별거 없어.'라고 하는거에요. 타 보고 재미없는 걸 아는 거랑, 타 보지도 않고 재미없겠구나 하는 건 다르지 않나요? 그래서 잊을만하면 한 번씩 '남산 케이블카를 타러 가자'라고 이야기했죠. 주로 해가 바뀌는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보신각 타종이 울리는 그 시점- 그때만요. 해가 또 바뀌었고, 올 해도 케이블카는 타지 못했으니 내년에는 탈 수 있으려나? 같은 의미랄까요?
"내가 다른 케이블카는 다 태워줘도 남산 케이블카는 안태워줄 거야."
"왜?"
"그냥. 약 올라서..."
그렇게 세월은 가고 2023년이 되었습니다.
지난달 말, 세브란스 안과 시술 때문에 보호자가 필요한 상황이 생겼어요. 남편과 함께 병원 진료를 받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
"여기까지 왔는데 남산 케이블카 타러 갈까?"
"정말? 웬일??"
"빨리 해줘 버리고 잊어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었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되새기는데 어떻게 잊어."
그렇게 우리는 남산 케이블카 주차장으로 향했습니다.
남편의 말 대로 케이블카는 정말 별 거 없었습니다. 깜짝 놀란 것 하나는 성냥갑 같은 케이블카에 콩나물시루 채우듯 사람을 밀어 넣어서 옴짝달싹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에요. 아무리 코로나 거리 두기가 해제되었다지만 몸 돌릴 틈 없을 만큼 사람을 밀어 넣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요. 티켓값이 저렴한 것도 아니거든요. 왕복 만사천 원이나 내고 풍경하나 감상할 수 없이 이동되어 버린(정말 딱 이런 느낌) 케이블카 운영 방침은 정말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도 고생 안 하고 산 정상에 오를 수 있게 된 건 정말 좋았어요. 야경이 없어 아쉬웠고, 그날따라 날이 맑지 않아서 더 아쉬웠지만 남산 위에서 내려다본 서울은 역시 우직합니다.
"남산 케이블카 타니까 좋아?"
"응."
"별거 없지?"
"응."
"거봐, 별 거 없다고 했잖아."
그래도 두 아이를 낳고, 남편과 단 둘이 마실 할 일 거의 없다 보니 참 좋았습니다. 첫 데이트의 기억도 새록새록 올라오고, 그때는 헉헉대며 비탈길을 올랐는데 20년이 지난 오늘은 케이블카를 타고 순식간에 정상을 오른 그 기분도 째졌거든요. 세월의 흐름 따라 주머니 가볍던 청춘은 가고, 그때보다는 좀 더 여유로워진 중년의 부부가 되어 오른 남산도 참 운치가 있었어요.
케이블카는, 생각보다 멋지지 않았고, 편안하지 않았고, 낭만적이지도 않았지만,
힘들이지 않고 정상에 올라 내려다본 서울도, 다닥다닥 열쇠를 걸어 둔 연인들의 흔적도, 아이들처럼 들떠서 이곳저곳 뛰 다니며 함께 찍은 사진도 추억 한가득 채워 마음속에 '저장'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