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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Jan 20. 2023

남편의 명절증후군

없이 살던 시절, 명절상은 그간 쇠약해진 몸을 보충시키고픈 엄마의 마음이었을 겁니다. 정성을 가득 담아 갖가지 찬으로 대접하고, 가는 길 바리바리 싸주고픈 넉넉한 인심까지 더한 명절을 보내고 싶으셨을 테죠. 하지만 지천에 널린 게 음식인 요즘 세상에서 명절상은 고된 노동의 산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싶으니 왠지 씁쓸하기만 합니다.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고픈 엄마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을 텐데, 매끼 같은 반찬이 오르내리는 명절상이 그리 반갑지 않게 된 것은 같은 찬을 두 번 먹지 않는 요즘 사람들의 변화된 식습관 탓인 것도 같습니다.


결혼 전에는 종갓집 장손 아버지 덕분에 명절만 다가오면 겁부터 났습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그 어마어마한 일들을 어떻게 해내신 걸까요? 묵묵히 그 길을 걸어내신 어머니들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해 드립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친정보다는 간소한 시댁 상차림이었습니다. 엄마를 도와가며 음식 준비를 했던 가닥이 있어 시댁 상차림 돕기는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댁에서 일만 하려 하면 다치고, 다치고, 다칩니다. 물건을 떨어드려 발등을 찧는가 하면, 급체를 하거나, 손을 베이는 등의 안전사고가 나는 겁니다. 일이 무섭지 않은 편이었는데 시댁에서 일손만 도우려 들면 사건이 생기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너무 잘하려고 하니까 긴장이 돼서 그런 것도 같습니다.


한 번은, 동글이가 7개월쯤 되었을 때였어요. 어른들이 주시는 음식을 아이가 넙죽넙죽 잘 받아먹으니 거실에서는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다가 껍질째 먹는 포도를 동글이의 손에 쥐어주신 거예요. 동글이는 포도를 한 입에 넣었고, 매끄러운 포도는 동글이의 목에 걸렸죠. 순간 질식 사고가 벌어진 거예요. 주방에서 일손을 돕다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동글이에게 달려갔어요. 아이를 거꾸로 안아 올려 등을 두드리고 복부 당겨 올리기를 수차례 했죠. 응급처치를 배워두길 얼마나 다행인지요. 동글이의 입에서 포도알이 튀어나오고 아이는 크게 울어재꼈죠. 그 울음소리가 얼마나 반갑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온 식구를 진땀 나게 한 그날, 명절을 치르는 즐거움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싸늘한 기운만 가득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그날 그 사건은 남편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겨주었어요. 동글이가 파랗게 질려가는 그 순간의 모습이 잊히지 않게 된 거죠. 벅적대는 명절 풍경, 상차림으로 분주한 주방, 날짜가 다가오기 전부터 준비해야 하는 선물, 오가는 길 꽉 막힌 도로와의 전쟁들이 가족들을 만나 나누는 반가움보다 앞서게 된 거예요.


"명절이 없었으면 좋겠어! 그냥 평소에 자주 보고, 같이 밥 먹고 하면 되지 꼭 명절에 만나서 그 많은 사람들이 좁은 집에 모여 북적대야 할 필요는 없잖아?"


다른 집 같으면 아내들이 할 말을 우리 집에서는 남편이 합니다. 명절이 다가오기 몇 주 전부터 명절 때 갈까 말까, 안 갈 수 있는 이유를 찾습니다.


"아니, 세상에 맛있는 게 천진데 꼭 그걸 만들어서 먹어야 해? 식당에서 먹으면 음식도 맛있고, 설거지도 안 해도 되고, 힘든 사람도 없고 좋잖아?"


남편의 고민은 어떻게든 개선하고픈 명절 풍경을 바꿔놓았습니다. 가족들에게 본인의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헀고, 한 번 바꿔보자고 시도한 '식당에서 식사하기'는 낯설지만 괜찮은 시도가 되었죠. 처음에는 명절음식 없는 명절이 어색했지만, 밥은 식당에서, 집에서는 다과와 대화, 함께할 수 있는 전통놀이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함께하니 분위기도 한결 좋아졌습니다. 적응하는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명절이 다가오면 식당을 예약합니다. 의외로 명절 당일 식당을 찾아 식사를 하는 가족들이 많아서 늘 인산인해입니다. 서서히 인식들이 변화되어 가는 거죠.


며느리가 바꾸기 힘든 문화이기도 합니다. 북적이는 명절 풍경을 즐기는 가정이라면 종전의 방법이 좋겠지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노동 없는 모임을 원한다면 바꿔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2023년, 구정은 3년의 코로나로 왕래가 적었던 시간을 거쳐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이는 명절이기도 합니다. 이왕이면, 남녀노소 상관없이 함께 만들고, 함께 먹고, 함께 나누는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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