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히 분석하고 따뜻하게 다독이기
이번 주말에는 마음이 헛헛해 오랜만에 모교를 찾았다. 오색의 단풍이 아름다웠고 햇살도 포근했다. 한참을 산책하다가 내가 다니던 단과대 건물 앞에서 '5급 공채 합격자 명단'이라는 거대한 현수막과 마주했다. 오랜 기간 고생한 동아리 후배의 이름도 보였고, 일면식 없는 과후배의 합격 소식도 접할 수 있었다.
현수막은 합격생에겐 최고(?)의 영광 중 하나다. 언젠가부터 현수막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일종의 로망이 되었다. 2010년 행정고시가 뭔지도 모르던 코흘리개 시절(.. 진짜 흘린 건 아니다) 현수막을 보며 '시험 하나 붙었다고 이름까지 걸어준다니, 고시는 역시 대단한 건가보다' 생각했다. 낯선 선배들의 이름을 괜스레 한 글자 한 글자 새겨 읽게 되었다.
현수막까지 걸어주며 축하하는 이유는, 그리고 아는사람 하나 없는 합격생 명단을 한번쯤 찬찬히 읽게 만드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수년간 쓴침을 삼키며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지나왔음을 알기 때문이다.
고시는 초시합이 불가능에 가까운 시험이다. 수험생의 99%는 최소 한 번 이상 불합격의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이쯤에서 강조하고 싶은 사실이 있다. 불합격의 충격에서 남들보다 빠르게 벗어나야 다시 열중할 수 있고 이듬해 합격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회복탄력성이 중요하다고 했다. 오늘은 불합격의 충격에서 빠르게 회복하는 방법을 전하고자 한다. 하루라도 빨리 털어내야 한 걸음이라도 합격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행시는 1~3차 시험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각 단계마다 불합격생이 발생한다. 혹자는 말한다. 1차 시험에서 떨어지는 것은 1층에서 떨어지는 것, 2차 시험은 2층에서, 3차 시험은.. 3층에서 떨어지는 충격과 같다고. 그만큼 2차, 3차로 갈수록 기대와 바람은 커지고 불합격으로 인한 충격도 커진다. 특히 3차 면접에서 낙방하는 경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듬해 시험까지 망치는 경우도 더러 존재한다.
1차 시험에서의 낙방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랬으면 브런치 글을 쓰기로 마음먹지도 않았을 것이다) PSAT은 노력(?)과 비례하지 않기 때문에 낙방하면 다른 차원의 충격이 온다.
낙방의 충격을 이겨내는 가장 클래식하고 좋은 방법은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다. 연인과 이별했을 때에도 헤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납득이 되지 않으면 마음을 추스르기 어렵듯, 시험도 마찬가지다. 내가 탈락한 이유가 무엇인지 논리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운이 나빴네' 정도로는 안 된다. (혹시 합격생들이 말하는 "운이 좋았죠"라는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 그건 그저 겸손을 위한 화법에 불과하다. 미안하지만 행정고시는 운이 거의 작용하지 않는다. 차라리 "운이 좋았죠"보다 "제가 더 간절했죠"라는 표현이 맞겠다. 운으로 여겨지는 대부분은 사실 간절함에서 온 결실이다.)
우리의 불합격은 운이 나빠서 생긴 일이 아니다. 간발의 차로 떨어졌더라도, 배탈이 났더라도 마찬가지다. 분명 부족한 점이 있었다. (배탈이 났다면 건강 관리를 잘못한 셈이다) 그 부분을 철저함을 넘어 처절할 정도로 냉정히 분석해서 재발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자기반성이 원래 어려운 법이다. 상처받은 스스로를 보듬어도 모자랄 판에 비판해야 하기 때문이다.
PSAT의 경우에는 잘못된 방식으로 접근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고 (훈련을 해야 하는데 '공부'하려고 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2차 시험은 기본기가 부족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3차 시험은 2차 시험 성적이 부족했거나 누가 봐도 좋게 보기 어려운 면접태도가 드러났을 가능성이 높겠다. 진짜 원인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인정하자. 인정하는 순간 납득이 가면서 마음이 한결 차분해질 것이다. 그 문제만 해결하면 내년엔 다른 결과를 받아볼 수 있다.
'꼴찌로라도 붙여만 주십쇼.. 어디든 가서 분골쇄신하겠습니다' 공부할 때는 다 이렇게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진짜 꼴찌로 붙으면 어떻게 될까? 큰일 난다. 특히 소수점 차로 떨어진 사람들이나, 3차 면접에서 2차 성적이 낮다는 이유로 낙방한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합격 후 연수원에서 4개월 간 연수를 받고 2~4개월의 지방 연수를 거치고 나면 희망부처에 지망하는 때가 온다. 그때는 '2차 시험 성적 + 연수원 성적 + 부처별 면접 점수 + (일부 부처에 한해) 전공/외국어 가산점'으로 부처가 결정되는데 이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2차 시험 성적이다. 다른 점수를 매우 탁월하게 받으면 모르겠으나 2차 시험성적이 절대적인 무게감을 지니고 있어 도통 뒤집기 쉽지 않다.
부처별 업무내용은 정말 가지각색이다. 대기업 계열사 간 업무가 상이한 것과 비슷하고 대학 내에서 전공별 수업내용이 다른 것과 비슷하다. 부처는 한 번 결정되면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에 (1:1 트레이드나 일방전입 등의 방법이 있으나 쉽지 않다. 특히 내가 비선호 부처에 있을수록 더더욱) 일생일대의 중요한 결정이라 생각하고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꼴찌로 붙는다? 아무도 지망하지 않는 부처(굳이 어디라고 말하지는 않겠다)에 가게 될 확률이 높다. 그보다 큰 문제는 '내가 원하는 부처'에 대한 선택권을 박탈당한다는 사실이다. 국장님들이 연수원에 다니던 시절에는 1등부터 순서대로 칠판에 가고 싶은 부처를 적었다고 한다. 면접도 없었단다. 정말 단순하고 잔인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성적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한 순간에 30년 청춘을 바칠 분야가 달라진다. 정부의 예산을 관리할지, 장애인 복지에 대해 고민할지, K팝과 한류의 진흥을 고민할지, 조선업의 발전을 고민할지, 국방력 강화를 추구할지, 국토발전계획을 수립할지, 이 엄청난 문제를 겨우 시험성적으로 결정하게 한다는 이야기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저조한 성적으로 붙을 바에야 1년 더 공부해서 높은 성적으로 붙는 편이 낫다. 1년 늦어지는 대신 남은 30년을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30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마음가짐으로 1년만 더 힘내자. 내년에 높은 성적으로 붙으면 1년쯤이야 거뜬히 보상받을 수 있다.
모든 합격생은 한때 불합격생이었다. (초시생이 합격하는 아기장수 우투리 같은 사례는 접어두자) 불합격은 여러분만이 겪는 고통이 아니다. 이 길을 거친 모두가 겪었던 일이다. 나도 네 번이나 겪었고 내 곁에서 일하는 동기와 선후배 모두가 수없이 좌절했다. 쓰더라도 삼키자. 위로하려고 건네는 말이 아니라, 불합격은 우리에게 겸손함을 심어주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주는 나름의 장점도 있다.
불합격의 기억은 최종 합격했을 때 불굴의 의지로 시험을 이겨냈다는 훈장(?)이 되기도 한다. 수없는 좌절과 실패를 견디고 합격했는데 앞으로 뭔들 못할까? 시험에 낙방하며 받았던 상처와 좌절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나를 굳건히 만드는 자양분이 된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자. 수많은 불합격자가 없었다면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한국사 시험과 다를게 무엇인가? 합격생에게 현수막을 걸어주는 일도 결코 없었을 것이다.
올여름, 무더위가 싫으셨는지 먼길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난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수능을 한번 더 치르기로 마음먹었을 당시 이런 위로의 말씀을 건네셨다. "괜찮다. 올해 대학 간 놈들보다 1년 더 살면 똑같다"
할아버지의 말씀은 두고두고 나의 비장의 무기가 됐다. 세상에 1년 더 살면 그만이라니 이런 기적의 멘탈관리법이 어딨나. 단순한 정신승리가 아니라 정말 일리 있는 말씀이다. 불합격했다면 올해 붙은 사람들보다 1년 더 살면 된다. ^^ (2년 더 살면 오히려 이득이 된다 세상에..) 어차피 일찍 합격해봐야 회사에서 청춘을 빼앗기는 건 마찬가지다. 그러니 불합격했다고 세상이 무너졌다고 여기지 말자.
남들보다 나이가 많은 30대 중후반 장수생이어도 괜찮다. 건강관리 잘하면 충분히 오래 산다. 몇 년 일해보니 공부보다 일하는 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안 좋으면 안 좋았지 좋을 건 없다. 공부는 내 의지로 하고 나를 위해 하지만 일은 남이 시켜서 하는 것이다. '내 의지로 하는 일'에서는 믿기 힘든 에너지가 나온다. 여러분 모두는 지금 놀라운 힘을 발휘하고 있다. (회사 다녀보면 안다. 출근하기 전부터 기운이 쏙 빠진다) 아무튼 요지는 건강만 유지하면 지금 뒤처진 시간쯤이야 만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끼니 거르지 말고 도움도 안 되는 술 마시지 말고 건강관리 잘하자.
불합격은 언제나 아프다. 내 경험에 비추어 말하다보니 행정고시를 기준으로 말했는데, 행시만 아픈 게 아니다. 시험 종류를 불문하고 내 젊음을 오롯이 바쳤다는 점에서 느끼는 고통은 같다. 그럼에도 우린 냉정해져야 한다. 이별의 아픔처럼 시간에 희석되길 바라선 안 된다. 용수철처럼 빠르게 회복하고 털어내야 내년에 빛을 볼 수 있다.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다시 달리기 위해 신발끈을 동여매자.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건강을 잘 관리하자. 우린 최소 1년 더 살아야 하는 이유가 생겼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