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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Jan 08. 2021

담당자의 의견은 당신이 숨는 방패가 아닙니다.

당신이 책임을 지고 내릴 결론을 돕는 지지대입니다.

“업무 메일? 난 그거 안 봐요. 하지만 중요한 메일은 내 참조를 꼭 넣어서 보내세요.”

업무 이메일을 쓰면서 참조를 넣고 빼는 건 일종의 스킬이다. ‘이 분이 보고 계시니 말조심해라’는 의미도 될 수 있는 동시에, ‘이런 일을 당신 앞에서 저지르고 있으니 어느 정도는 당신의 책임입니다’라는 책임 전가의 의미도 되는 것. 통상적으로 업무에 대한 내부 협의는 상급자가 자신이 참조된 이메일을 보았다는 가정 하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고, 자신이 참조로 엮인 이메일을 보고 담당자에게 내용을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상상을 초월하는 우리 리더께서는 업무 메일도 읽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의 메일함을 읽고 주요 내용을 따로 보고하도록 직원에게 시키시었다. 얼마나 뻔뻔하신지 메일을 보셨냐고 묻는 질문에 ‘업무 메일? 난 그거 안 봅니다’란 대답을 들었을 때는 말문이 막혔을 정도. 손바닥만 한 그물로 낚시를 하는 것처럼, 놓치는 정보들이 늘어갔고 개중 몇몇은 사고가 되어 되돌아왔다. 그럴 때면 항상 그는 ‘왜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냐’며 담당자와 더불어 업무 메일 모니터링 요원(!)을 닦달하기 일쑤.

담당자 의견은 참고하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 뒤에 숨으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돌이켜보면 그는 항상 담당자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매우 합리적인 리더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비겁한 리더에 가까웠다. 그에게 있어 ‘담당자의 의견’은 방패 내지 보험에 불과했다. ‘리스크에 대한 책임은 그 의견을 낸 사람에게 있다’는 묘한 논리. 그럴 거면 의사결정구조는 왜 존재하며, 직급과 체계는 왜 존재하는가.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한 책임까지도 직원에게 전가시키는 지도자였다. 일례로, 내가 맡았던 사업을 A라는 장소에서 추진하려고 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그는 B에서 추진하라 지시했다. 초도 분석을 한 결과를 제출하고 논의를 하던 중, ‘담당자가 생각하기에는 B에서 진행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가?’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A가 더 나을 것 같다는 답변을 하고 나서도 그는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B라는 답변을 유도했다. 결국 더 큰 비용과 시간을 두고 B에서 진행을 하는 안을 제출했더니 ‘담당자가 B에서 하기로 했으면서 이렇게 진행을 하는 건 낭비’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몽글몽글 피어나던 나의 마음은 그 시기에 응고되었고,
나는 구체적으로 엑시트 플랜을 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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