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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Mar 16. 2022

미술상이 반드시 화가일 필요는 없다

‘자신이 파는 아이템에 대해 제조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첫 직장, 수출상사에서의 황금룰이었다.

물건을 잘 알고 있어야 제조사를 대신해서 잠재적 고객사들 앞에 이런저런 설명과 설득을 해야 하는 동시에, 때로는 제조사들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기 위해 그들이 우리에게 감출 수 있는 데이터 값들을 간파해내기 위해서. 당시에는 뭘 이렇게까지 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기도 하고 첫 직장의 각인은 생각보다 오래 남아서, 지금도 나는 가급적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업무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스페인어에는 ‘안다'는 것을 표현하는 두 가지의 동사가 있다. saber와 conocer가 그것인데, 전자가 인지적으로 어떠한 개념 등을 알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면, conocer는 직접 체득한 경험적 지식을 설명할 때 쓰인다.

사무직으로 오랫동안 일을 해 온 나에게 업무적인 ‘학습'은 거의 saber의 영역에 존재했다. 어떠한 절차로 어떠한 서류를 처리하고 상대방에게 어떠한 식으로 접근하여 내가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가. 소위 노하우(Know-how)라고 하는, 경력에서 비롯된 경험적 지식도 있지만 그 또한 정보를 인지하고 처리하는 인지의 영역에서의 경험적 지식이었다

반면, 자신의 신체 일부를 활용하여 무언가를 창조하는 직군과 일을 하게 되면, 그 정반대로 conocer의 영역에서 지식을 체득한 사람들과 협력하게 되는 상황에 놓인다. 이들은 도제식으로 교육을 받아서 어떠한 작품을 창조하고 만들어내는 법을 배웠고, 무언가를 배우는 과정은 반드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한 체득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여기서 ‘우리'와 ‘그들' 사이의 괴리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예술계는 자신들이 이해받지 못하고, 단지 몇 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실태를 조사하는 것만으로 항상 ‘타자화된 시선'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자신들의 편의에 맞춰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현장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분석을 직접 체득을 통해 얻지 못한 채 제시하는 정책은 온전히 자신들을 위한 정책일 수 없다는 것.

그렇지만, 외부자의 시선에서 전체를 바라보는 데에서 산업 전체를 이끄는 방향이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행정가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계를 이루는 각각의 요소들을 세부적으로 체득(conocer)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각각의 요소들에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고(saber) 그러한 지식을 깊이 분석해서 방향과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는, 예술계와 문화행정이 상호 협력을 통해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가 가진 차이점을 정확하게 알고, 각자의 시각에서 다양한 입장을 합쳐서 하나의 스펙트럼을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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