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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내러티브를 통해 세상을 소비하지 않겠다

르네 라이트와 알폰소 쿠아론의 [디스클레이머]를 보고

by Pseudonysmo

코끼리를 처음 마주친 세 맹인의 이야기와 더불어,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각기 다른 관점은 전체의 일부만을 알 수밖에 없다는 예시로 자주 영화 [라쇼몽]이 언급된다. 인간의 식견과 이해의 범위가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어렵거나 사실 불가능한 것이라는 교훈을 얻게 되는 이야기. 각자가 자신의 관점과 이익에 몰입된 상태로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 사건의 전개를 얼마나 왜곡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

르네 나이트의 소설 [디스클레이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의 아집이 상상력과 결합되었을 때 얼마나 큰 파괴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상상도 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애써 묻은 채로 2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내오던 한 여성에게 갑자기 찾아온 과거는 작가의 상상력을 가속도로 삼아 상상도 못 할 방향으로 불어나 눈사태처럼 그녀를 덮치고, 20년의 이자를 포함한 사실을 주변 모두에게 증명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원작을 기반으로 한 동명의 시리즈물을 공개했다. 이야기가 가지는 파괴력이라는 원작의 주제의식을 내레이션이라는 형식으로 효과적으로 드러내면서도, 매체의 특이점을 최대한 살려 시각적인 자극을 통해 원작에 한 겹의 레이어를 더해 예술이라는 핑계와 단서조항(disclaimer)이라는 방패로 얼마나 우리가 여성에게 폭력적인 문화를 강제해 왔는가를 충격적인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2025년 초에 시리즈물을 보고 난 뒤 원작 소설까지 읽으면서, 예전부터 오랫동안 생각해 왔고 2024년 12월부터 확고하게 머릿속에 자리 잡은 생각이 더욱더 구체화되었다.

세상을 이해하고 이슈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상상을 활용하고 싶지 않다.

모두가 그렇듯,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고, 왜 저 인물은 저러한 선택을 했을지에 대한 설명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루어져야만 만족하게 된다. 결론까지 도달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나는 그 결론까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도달해야만 했다. 차가운 이성으로 굳건히 세워진 길을 통하거나, 따뜻하고 유연한 감성의 뱃길을 따라. 그리고 과정에서 지어진 결론까지의 길은 대부분 내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얻은 정보를 기반으로, 살아오며 맞닥트린 다양한 현실과 허구의 내러티브를 양분으로 삼아 쌓아 올린 줄기들이었다. 그 줄기들은 하나의 거대한 나무가 되었고, 나는 그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고 내가 삶을 살아가는 모든 가치의 굳건한 기반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인간의 인식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그 한계를 상상과 내러티브로 채워나간 그림은 어쨌든 허구를 담고 있다. 동시에 세상은 복잡해져만 가서, 나는 내러티브를 통해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단순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단순화된 세상은 더욱더 내러티브화된 콘텐츠의 형태로 공급되고 나의 머릿속에서 생산되어, 나는 그 내러티브를 간식처럼 소비하기 시작한 것만 같다.

세상은 내러티브로 소비되는 콘텐츠가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이고 현실이다.
나는 그동안 나의 편의를 위해 모든 것을 편리하게 소비해 온 것은 아니었을까.
아내는 내가 그녀를 재창작했듯 조나단을 재창작했다. 나는 아내만큼이나 큰 망상의 죄를 지었다. 나는 조나단이 죽기 오래전부터 아내가 삶의 방향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할 만큼 용기 내지 못했다. 수년간 나는 아내가 환상 속에 침잠하는 것을 도왔고, 그녀의 맹목적인 헌신에 동참했고,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맞서서 저항하지 않았으며 창작된 아내와 조나단에 동참했다. 내 유일한 변명은 그것이 사랑에 기인했다는 것이고 그녀 또한 그랬지만 그다지 효과적인 변명은 아닐 것이다.
- Knight, Renée. Disclaimer: A Novel (English Edition) (pp. 320-321).


P.S. 서두에 언급된 [라쇼몽]을 나는 사실 보지 못했다. 보지도 않은 것을 마치 아는 듯이 이야기하며 글의 서두를 떼고, 글의 마무리에서 이 사실을 굳이 적고야 마는 나는 아직도 오만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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