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한국에서 '요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핸드폰으로 전화가 오는 경우는 인터넷/핸드폰 가입 권유 전화인 경우가 전부였다. 070으로 시작되는 번호로 전화를 받는 데 익숙해져 있었고, 대부분의 경우는 스팸 필터를 통과하기 때문에 받지 않고 거절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아무 생각 없이 본 화면에는 02로 시작하는 번호가 떠 있었고, 이어지는 국번 세 자리는 무슨 이유에선지 낯이 익었다.
이미 퇴사한 지 거의 2년이 지난, 내 첫 직장에서 온 전화였다.
무의식적으로 일단 상대 쪽에서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린 뒤 침착하게 예전 직장 동료들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았다. 심지어 HR 부서에서 온 전화였다. 대체 왜 HR에서 내게 왜?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약 3년 정도보다 근속연수가 낮은 채, 그러니 대리 진급을 하지 않고 회사를 나간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화를 돌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왜 그들이 퇴사를 선택했고 앞으로 회사의 인력 관리에 있어 도움이 될 만한 피드백을 받고 싶다며. 그렇게 긍정적인 상황에서 결정한 퇴사가 아니었고, '커리어 상 원하는 분야가 따로 있어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다'라고 둘러대었다. 사실이기도 했기에 '신사업 개발 부서로 이동하는 길도 있었을 텐데'하는 추가 질문에도 대강 대답하고 대화를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사실 저 질문을 듣는 순간 회사 현업 분위기를 잘 모르는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대방이,
'감당할 수 없는 클레임/사고에 떠밀려 퇴사를 결심하신 건 아닌가요?'라고 묻는다.
그 순간 반사적으로 '아, 이게 앞에서 말한 목적의 통화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잠시 생각을 해본 뒤, '어디서 들으신 내용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뭐 이제 와서 달리 드릴 말씀은 없다'라고 답했다.
사실 당초 일하고 싶지 않았던 분야에서 일하게 된 것도 사실이었지만, 금전적인 보상은 충분했고 굳이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것도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사를 결심했던 것은 사실 1) 마치 벽에 대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이 소통이 되지 않았던 멘토, 2) 일을 할 생각 자체가 없어 협력이 불가능했던 카운터파트, 3) 그리고 여러 번의 인사상담에서 '결국 너의 이니셔티브 부족이니 더 노오력을 해라'로 일관했던 부서장 사이에 둘러싸여 2년 동안 끊임없이 자신감을 잃고 방황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지나간 일들을 언급해서 아직 회사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화풀이를 해야 할까도 싶었지만, 이미 회사를 나온 상황에서 나는 이미 그들에 일말의 관심도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들이 정말로 인력 관리의 개선을 필요로 했는지, 아니면 정말 사내에서 문제가 생겨서 그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는지는 내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문득, 내가 2년 동안 보아왔던 회사의 생태를 떠올리고 나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 회사는 계속해서 굴러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정상적인 업무 방식을 고집하거나 심지어 사손을 끼친 사람도 결국 회사를 다니고, 윤리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도 고작 몇 개월의 감봉으로 처분이 끝나는 그런 회사.
이미 썩어 문드러진 거대한 좀비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