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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피로스 Jun 30. 2020

<노인과 바다>, 패배로 얻어낸 승리

백수일지 D+19 (2020.06.30)

84일 동안 바다에 나가 한 마리의 고기도 낚지 못한 채 한 늙은 어부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평생 바닷일을 하며 살아온 그는 나이가 들고 온몸에 성한 곳 하나 없지만, 눈동자만큼은 대양처럼 푸르고, 그의 삶을 향한 의지처럼 언제나 생기가 흘러넘칩니다. 그리고 다음날 바다 먼 곳으로 나간 노인은 자신이 탄 배보다도 더 큰 바닷속 생명체를 만나게 되고,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사흘 밤낮 동안 사투를 벌입니다. 누군가가 살면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필사적인 상황 끝에 노인은 가까스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싣지 못할 만큼 커다란 물고기를 배에 묶은 채 돌아오면서 상어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고 노인은 모든 걸 잃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패배했습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다 잃어버린 거구나. 남은 건 없는 거구나.' 머리를 식히고 뻐근한 허리를 펴주러 카페 테라스에 나가 담배를 하나 피웠습니다. 순간 묘한 감정이 남아있더군요. 소설의 처음과 끝까지 내가 노인이 되고, 노인의 생각과 감정을 느끼며 함께한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분명 다 잃었지만 뭔가 남아있는 듯한 이 기분. 노인은 정말로 다 잃어버린 걸까. 그에게 남은 건 하나도 없는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왠지 어부 닮았어요.


패배했지만 승리했다. 그는 처절히 싸웠고 많은 걸 잃었지만 또한 분명한 뭔가를 얻었습니다. 소설의 이 지점이 독자로 하여금 문학적 상상력을 지극히 자극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노인이 무엇을 얻었느냐에 대한 의견은 저마다 다르겠지요. 분명한 건 한 순간이지만 소설 속 주인공이 되어 모든 과정을 그와 함께 겪었던  제겐 선명한 '승리'의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노인은 사흘밤낮 사투를 벌여 잡은 고기도 잃고, 상어의 공격으로부터 고기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배를 훼손시키고, 장비도 잃게 됩니다. 상처 투성이의 몸은 성한 곳이 하나도 없고 당장 정신줄이 끊어질 것만 같은 상태에서 가까스로 육지에 발을 내딛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잃었고 겉으로 보기엔 패배한 것처럼 보입니다. 물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전유물과 자신의 재산을 잃었기에 노인은 돌아온 순간 자신의 패배를 절감합니다. 


하지만 평소 자신이 아끼던 한 소년의 말을 빌려, 작가는 노인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목소리를 세상에 드러냅니다. '할아버지는 진 게 아니에요.' 노인이 그것을 의식하고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분명 현재, 거대한 자연과의 싸움이자, 스스로와의 전투이기도 했던 그날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분명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스스로를 초월한 정신적 성장의 순간을 경험합니다. 어찌 보면 그는 세속에서는 패배했지만 그것을 초월한 정신적 승리를 얻어낸 것이 아닐까요.


이번엔 여과 없이 마구 휘갈겨 쓴 독후감이지만, <노인과바다>에 대한 서평은 날을 잡아 다시 한번 제대로 써보고 싶네요. 부끄럽지만 책을 읽은 뒤 떠오른 생각들을 날 것 그대로 기록해봅니다. 아래엔 흥미로웠던 작품해설의 일부분을 남깁니다.


<노인과 바다>의 주제와 관련해 노벨 문학상 선정 위원회는 "폭력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현실 세계에서 선한 싸움을 벌이는 모든 개인에 대한 자연스러운 존경심"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싸움'이란 물질적 또는 육체적으로는 파멸당해도 정신적으로는 패배하지 않는 산티아고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산티아고는 결과보다는 과정, 목표보다는 수단과 방법에 무게를 싣는 인물이다. 죽음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삶이란 어쩔 수 없이 '승산 없는 투쟁'일는지 모른다.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 곧 인간 실존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패배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백절불굴의 정신이다.

김욱동, <노인과 바다> 작품해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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