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언제 인생의 밑바닥을 보았는가?
주마등(走馬燈), 사람은 죽기 전에 머릿속에서 지난날의 추억들이 펼쳐진다고 하지.
의미는 조금 다를 수 있는 데 난 지금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다. 아니 솔직히 이대로 죽고 싶다. 오늘 만을 위해 수년간, 수천 권의 책을 정독해왔고, 온갖 영상물 들을 접하며 실력을 쌓아 왔다고 철썩 같이 믿었거든. 정말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 했고, 어느 누구에게도 지식적으로 꿀리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대비해 왔던 나인데...
그런데 지금 난 왜 이런 엿 같은 기분은 만끽해야 하는 거지? 난 왜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냐 말이다. 그 동안 내 노력은 어디로 갔나? 어디로 갔어? 어데로 가...
시간은 도깨비 방망이라도 휘두른 듯 뚝닥뚝닥 흘러가는데 난 여전히 굳어진 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내 옆 자리 경쟁자들. 그들은 나와 달리 자신감을 펜에 실어 저리도 열심히 써내려가고 있는데 난 첫 줄도 완성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서있다. 누가 제발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날 묶어버린 손의 사슬을 벗어 던져 지옥에서 꺼내주오.
난 왜 멈춰 버린 걸까? 도대체 짧디, 짧은 이 두 글자를 두고...
그 동안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본 단어만도 수 만개가 넘는 데 난 왜 이 짧은 두 글자 앞에서 굴복하고 만 것이냐 말 야! 미칠 것 같다. 도무지 써 내려 가지지가 않는다. 도대체 이 단어로 어떠한 이야기를 해서 이 위기를 극복할 것인가?
생각해 보자. 그 동안 살면서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언제인지, 그리고 그 기억을 되살려 어떻게든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아주 차분하게 생각하고 써내려 가보자.
“으...좀...제발!!!”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내 손은 좀처럼 나아가지 못한다. 마치 커다란 벽이 바로 코앞에 턱하니 놓여서는 뚫어버리지 않고서는 절대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해 주듯이.
절망.
그래 난 오늘의 글쓰기 주제인 절망이란 두 단어에 굴복하며 목청껏 절규하고 있다. 내 그 동안 어떠한 주제로도 서슴없이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다 믿었고 그만큼 훈련하고 철저하게 준비했다고 믿었는데 말이다. 그게 자신감이 아닌 자만이었던가! 아...
그렇게 한 참을 절규하며 고민에 빠져 있던 무렵, 문득 얼마 전 ‘글쓰기 명인을 찾아서’ 라는 주제로 나를 인터뷰했던 한 여 기자의 질문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인생을 살면서 언제 가장 절망을 느끼셨습니까?”
난 그 때 기자의 질문에 위트까지 섞어가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당당하게 답했던 기억이 난다.
“글쎄요... 절망이요? 딱히 느껴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절(저를), 망하게 한다면 그 때 이 말을 실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흔히 말하는 아재 개그. 언어유희를 베이스로 한 농담을 섞어가며 재치 있게 답했던 그 순간. 지금은 그 때의 기억이 왜 이리 부끄럽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어떻게든 몸을 구겨 넣어 숨어 들어가고 싶을 만큼.
난 지금 몹시도 절망하고 있다. 그 기분은 나를 지구 중심부 근처까지 초대한다. 밑바닥? 그게 나의 현주소라는 모래퍼의 가사처럼 땅바닥에 혓바닥을 대고 기고 있다. 절망이라는 이 짧디 짧은 단어는 작가라는 타이틀을 걸고 살아 온 30년 인생 통틀어 가장 나를 절망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망...
그리고 지금도 난 이 주제로 한 문장도 미쳐 완성하지 못한 채 절규하고 있다. 작가로써 글을 쓰지 못하는 이 순간. 아마도 가장 치욕스럽고 절망적인 순간으로 기억 될 것이다. 앞으로 내가 작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먹고 살 수 있을까 라는 자괴감마저 들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