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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ign Aug 04. 2016

돈을 빌려주는 마음가짐

호의가 후회되지 않으려면

밀라노는 지금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세일의 열풍도 뜨겁다. 평소엔 올려다보지 못할 고가의 브랜드가 서민의 품에 친근해지는 여름 세일이 7월 2일 토요일에 시작되었다. 한국에 사는 언니의 명을 받잡고 나 역시 세라발레 아웃렛(serravalle outlet)에서 가방 몇 개 집어 들었다. 언니와 톡으로 사진 찍어가며 뭐가 좋네 더 괜찮네, 가격 얼마네 하면서 쇼핑의 대부분의 시간은 후딱 날려버린 우리는 결국엔 시간이 부족해 정작 사야 할 남편의 티 쪼가리는 사도 못했다. 그래도 우린 여기 사니까. 그리고 여름 세일 기간에는 밤 12시까지 문을 연다고 하니 다음에 바닷가 갔다가 밀라노로 돌아오는 길에 사면된다. 가방을 받아보며 기뻐할 언니의 모습을 생각하니 쇼핑의 고단함도 대수롭지 않다.


결혼하고 난 후 신접살림을 밀라노에 차린 우리는 딱히 마련해야 할 혼수 같은 건 없었다. 전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제대로 가구가 갖춰진 월세를 찾는 게 밀라노에 소프트 랜딩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소프트 랜딩 기간을 거치는 동안 서로의 옷장과 살림에 대해 빠삭하게 알게 된 우리는 남편의 옷장이 형편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상하게도 여자들은 처녀 때 산 옷들이 형편없지 않은데, 남자들은... 이건 그야말로 잼뱅이 었다. 어떻게 연애할 때는 이 남자의 옷장이 궁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그렇게 패션 센스가 뛰어난 것도 아닐 것인데. 하기사 우린 장거리 연애였으니 그와 자주 만날 기회는 출장지가 다였고 만나도 양복만 입었으니 알 턱이 없었다. 그렇게 막상 그의 옷들과 신발들을 집중적으로 몇 년사게 되니 이제는 제법 밖에 내놓아도 허접해 보이지 않는 수준에 까지 이르렀다. 내 느낌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남자들도 '괜찮아~'하면서 은근 물건 욕심이 그득하다는 것이다. 하기사 인간인데 뭐 다르겠느냐마는. 견물지심 아니던가. 남편의 물건을 사면서 특히 아쉬웠던 건 남성용 신발이었다. 이 곳에 주재했던 이랜드 분을 통해 Lario라는 신발 브랜드를 알게 되었다. 그분 덕택에 아웃렛 가격 플러스 직원 할인까지 받아 남편의 신발을 대대적으로 마련했었다. 그리고 이년 후 집에 있는 신발들도 좀 쉬게 할 겸 이번에도 Lario outlet에 가서 신발 몇 켤레 집어와야지 생각했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의 흐름이 아웃렛과 쇼핑이 된 듯하지만 골자는 이러하다.

신발을 오래간만에 사러 가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할 즈음, 이제 막 주재로 나오신 어느 가정도 신발을 사고 싶으셨더란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언니의 가방을 사러 세라발레 아웃렛에 간 날, 데자뷔처럼 그분들을 만났고, 이주 후 함께 신발을 사러 가기로 약속하게 된다. 그 집도 밀라노에 사는 남성들 패션이 한국과 좀 달라서 이곳에 맞게 좀 맞춰줄까 해 옷은 이것저것 어떻게 샀는데 신발이 애매했다고 한다. 그래서 겸사겸사 함께 라리오 매장에 가게 되었다. 매장에 도착 후 난 신발에 눈이 먼 남자들의 눈빛을 보고야 말았다! 귀찮음을 마다하고 매장 안에 세일하는 자기 사이즈의 신발들은 거의 다 신어보는 것 같았다. 우리 남편도 그렇다지만 그쪽 남편도 장난 아니었다. 우리 두 아내는 남자들의 스타일을 봐주며 희생의 아이콘이 되었다. 우리는 두 켤레 거기는 세 켤레를 집어 들고 매장에서 밑 창과 구두약, 구둣주걱까지 챙겼다. 그리고 계산할 때 안타깝게도 그 집은 현금이 부족해 한국의 신용카드까지 써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직 소프트랜딩 중이셔서 자금의 흐름이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아는 우리는 선뜻 돈을 빌려준다 했다. 처음엔 망설이시는 것 같더니 그 집 남편 집사님의 단호한 결단으로 일단 우리에게 100유로를 빌리셨다. 다음 주에 갚겠다는 철석같은 약속과 함께.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약속한 다음 주에 나타나지 않았다.


탈무드를 보면 굴뚝에서 내려온 아이가 세수를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 아이가 세수를 한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금전적인 면에선 칼 같다는 말을 들은 나는 돈에 있어선 나름 엄격하다. 내가 누구에게 돈을 빌리면 잊지 않고 되도록 제시간에 갚았다. 그럴 수 없다면 묻지 않아도 그 이유를 설명했다. 물론 나는 그들이 돈을 안 갚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이 밀라노의 한인사회가 너무 좁다. 휴가나 아니면 다른 이유로 인해 교회에 불참한 것이라 생각한다. 단지 아쉬움이 있다면 그 여자 집사님은 나의 톡도 알고 있고 이야기도 몇 번 주고받은 사이라는 거다. 그냥 사정이 이러하니 이해해 달라는 메시지만 날렸어도 그들에 대한 우리의 호의가 후회로 바뀌진 않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다. 돈을 빌려주는 것과 빌리는 것. 사람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는 정의가 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돈을 빌려줄 때나 빌릴 때, 상대방에게 기본적인 예를 다하지 않았을 때 돈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되는 것이 더 손해일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아직 돈을 받지 못했다. 다가오는 주에 그들이 교회에 참석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빌린 돈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불확실성보다는 그들에 대한 내 마음속의 평가가 나를 더 괴롭게 한다. 다시 마주친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호기롭게 웃을 나의 거짓 웃음을 알기에. 너무나 거짓된 나의 모습이지만, 그들을 통해서 나도 또 하나의 교훈을 얻었음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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