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가 후회되지 않으려면
밀라노는 지금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세일의 열풍도 뜨겁다. 평소엔 올려다보지 못할 고가의 브랜드가 서민의 품에 친근해지는 여름 세일이 7월 2일 토요일에 시작되었다. 한국에 사는 언니의 명을 받잡고 나 역시 세라발레 아웃렛(serravalle outlet)에서 가방 몇 개 집어 들었다. 언니와 톡으로 사진 찍어가며 뭐가 좋네 더 괜찮네, 가격 얼마네 하면서 쇼핑의 대부분의 시간은 후딱 날려버린 우리는 결국엔 시간이 부족해 정작 사야 할 남편의 티 쪼가리는 사도 못했다. 그래도 우린 여기 사니까. 그리고 여름 세일 기간에는 밤 12시까지 문을 연다고 하니 다음에 바닷가 갔다가 밀라노로 돌아오는 길에 사면된다. 가방을 받아보며 기뻐할 언니의 모습을 생각하니 쇼핑의 고단함도 대수롭지 않다.
결혼하고 난 후 신접살림을 밀라노에 차린 우리는 딱히 마련해야 할 혼수 같은 건 없었다. 전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제대로 가구가 갖춰진 월세를 찾는 게 밀라노에 소프트 랜딩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소프트 랜딩 기간을 거치는 동안 서로의 옷장과 살림에 대해 빠삭하게 알게 된 우리는 남편의 옷장이 형편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상하게도 여자들은 처녀 때 산 옷들이 형편없지 않은데, 남자들은... 이건 그야말로 잼뱅이 었다. 어떻게 연애할 때는 이 남자의 옷장이 궁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그렇게 패션 센스가 뛰어난 것도 아닐 것인데. 하기사 우린 장거리 연애였으니 그와 자주 만날 기회는 출장지가 다였고 만나도 양복만 입었으니 알 턱이 없었다. 그렇게 막상 그의 옷들과 신발들을 집중적으로 몇 년사게 되니 이제는 제법 밖에 내놓아도 허접해 보이지 않는 수준에 까지 이르렀다. 내 느낌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남자들도 '괜찮아~'하면서 은근 물건 욕심이 그득하다는 것이다. 하기사 인간인데 뭐 다르겠느냐마는. 견물지심 아니던가. 남편의 물건을 사면서 특히 아쉬웠던 건 남성용 신발이었다. 이 곳에 주재했던 이랜드 분을 통해 Lario라는 신발 브랜드를 알게 되었다. 그분 덕택에 아웃렛 가격 플러스 직원 할인까지 받아 남편의 신발을 대대적으로 마련했었다. 그리고 이년 후 집에 있는 신발들도 좀 쉬게 할 겸 이번에도 Lario outlet에 가서 신발 몇 켤레 집어와야지 생각했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의 흐름이 아웃렛과 쇼핑이 된 듯하지만 골자는 이러하다.
신발을 오래간만에 사러 가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할 즈음, 이제 막 주재로 나오신 어느 가정도 신발을 사고 싶으셨더란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언니의 가방을 사러 세라발레 아웃렛에 간 날, 데자뷔처럼 그분들을 만났고, 이주 후 함께 신발을 사러 가기로 약속하게 된다. 그 집도 밀라노에 사는 남성들 패션이 한국과 좀 달라서 이곳에 맞게 좀 맞춰줄까 해 옷은 이것저것 어떻게 샀는데 신발이 애매했다고 한다. 그래서 겸사겸사 함께 라리오 매장에 가게 되었다. 매장에 도착 후 난 신발에 눈이 먼 남자들의 눈빛을 보고야 말았다! 귀찮음을 마다하고 매장 안에 세일하는 자기 사이즈의 신발들은 거의 다 신어보는 것 같았다. 우리 남편도 그렇다지만 그쪽 남편도 장난 아니었다. 우리 두 아내는 남자들의 스타일을 봐주며 희생의 아이콘이 되었다. 우리는 두 켤레 거기는 세 켤레를 집어 들고 매장에서 밑 창과 구두약, 구둣주걱까지 챙겼다. 그리고 계산할 때 안타깝게도 그 집은 현금이 부족해 한국의 신용카드까지 써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직 소프트랜딩 중이셔서 자금의 흐름이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아는 우리는 선뜻 돈을 빌려준다 했다. 처음엔 망설이시는 것 같더니 그 집 남편 집사님의 단호한 결단으로 일단 우리에게 100유로를 빌리셨다. 다음 주에 갚겠다는 철석같은 약속과 함께.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약속한 다음 주에 나타나지 않았다.
탈무드를 보면 굴뚝에서 내려온 아이가 세수를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 아이가 세수를 한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금전적인 면에선 칼 같다는 말을 들은 나는 돈에 있어선 나름 엄격하다. 내가 누구에게 돈을 빌리면 잊지 않고 되도록 제시간에 갚았다. 그럴 수 없다면 묻지 않아도 그 이유를 설명했다. 물론 나는 그들이 돈을 안 갚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이 밀라노의 한인사회가 너무 좁다. 휴가나 아니면 다른 이유로 인해 교회에 불참한 것이라 생각한다. 단지 아쉬움이 있다면 그 여자 집사님은 나의 톡도 알고 있고 이야기도 몇 번 주고받은 사이라는 거다. 그냥 사정이 이러하니 이해해 달라는 메시지만 날렸어도 그들에 대한 우리의 호의가 후회로 바뀌진 않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다. 돈을 빌려주는 것과 빌리는 것. 사람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는 정의가 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돈을 빌려줄 때나 빌릴 때, 상대방에게 기본적인 예를 다하지 않았을 때 돈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되는 것이 더 손해일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아직 돈을 받지 못했다. 다가오는 주에 그들이 교회에 참석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빌린 돈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불확실성보다는 그들에 대한 내 마음속의 평가가 나를 더 괴롭게 한다. 다시 마주친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호기롭게 웃을 나의 거짓 웃음을 알기에. 너무나 거짓된 나의 모습이지만, 그들을 통해서 나도 또 하나의 교훈을 얻었음에 감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