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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풍 박석준 Jul 13. 2020

혜자의 눈꽃

  탐스러운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마당 안을 메워버릴 것처럼 눈송이들이 어지럽게 달려들었다. 찬 바람 속에서도 노란빛을 발하던 소국 봉우리도 하얗게 눈을 뒤집어썼다. 올해는 눈이 없는 겨울이라고 한 뉴스를 본 지 며칠이 지나지 않은 때라 더 반가운 눈이었다. 차창에 쌓인 눈을 쓸어내고, 시동을 걸었다. 눈 녹은 물이 흘러내리는 윈도 넘어 눈밭 속에 노란 혜자의 눈꽃이 보였다. 

  ‘개울 쪽에서부터 이쪽까지 다섯 개의 눈꽃들이 그 어지러운 발자국들 틈에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그 눈꽃들은 앙증맞도록 작은 발자국이 맴을 돌며 꽃잎의 결을 새겨 가고 있었는데, 그 눈꽃의 한가운데쯤에는 노란빛 물이 번져 있어, 마치 노랑색 꽃술에서부터 꽃잎이 피고 있는듯한 조밀스러운 것이었다.’ (출처 : 천승세, 혜자의 눈꽃 중에서)

  차창으로 하얀 눈이 덮인 풍경이 나타날 때마다 혜자의 눈꽃이, 아니 내가 만들다 만 노란 꽃이 눈에 어른거렸다. 바지를 내리고 흰 눈 위에 오줌을 갈기는 순간, 노란 물이 들며 구멍이 났다. 하얀 눈 속을 파고드는 오줌 줄기에 정신이 팔려 맨살이 드러났는데도 한기를 느낄 수 없었다. 어린 혜자가 만든 앙증맞은 꽃잎은 새기지도 못한 채 노란 흔적만 남겼다. 사방이 온통 하얗게 변하지 않았다면 생각도 할 수 없는 놀이었다. 

  사무실 창문을 열었다. 어느새 진눈깨비로 변해있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엔 늘 자유로운 영혼을 꿈꿨다.      

진눈깨비 내리는 날

막걸리 한잔할 사람 

이런 날 어때하고 

톡을 보내면 

올 수나 있어 

미친놈

진눈깨비 내리는 날 

나만 미쳤구나.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괴춤을 내려 꽃을 만들던 어릴 때처럼, 누구의 눈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인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따뜻한 구들장에 등을 대고 누웠다. 손을 뻗어 물컹한 젖가슴을 간지럽혔다. 진한 샴푸 냄새가 목선을 타고 내 얼굴로 흘러 내려왔다. 지나가는 열차 소리에 달콤한 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느새 진눈깨비가 비로 변해 내리기 시작했다.

  혜자의 눈꽃을 보았던 그 날 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혜자를 TV에서 만났다. 스물다섯 여자가 순식간에 칠십을 훌쩍 넘은 노인으로 변해 겪는 이야기였다. 엄마의 손이 필요했던 예닐곱의 혜자가 사람의 손이 절실한 칠십 노인이 되었다는 대사가 들려 왔다. 노란 눈꽃을 만들던 어린 혜자가 내 이야기였던 것처럼 드라마 속 혜자도 역시 나였다. 

  한강철교 위 전철 차창 너머엔 머리가 하얗게 센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다. 당연히 검은 머릿결의 낯익은 젊은 사내가 있을 줄 알았다. 전철 바퀴 소리는 그때처럼 여전히 크게 덜컹대고 있었다. 같은 다리 위, 같은 자리인데 순식간에 나이가 들어버린 건 나뿐이었다. 눈이 부시게 하얀 눈 위에 펼쳐진 노란 혜자의 눈꽃 위로 내 꿈은 눈발이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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