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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풍 박석준 Jul 14. 2020

립스틱 짙게 바르고

     에로 영화 포스터엔 여자의 붉은 입술이 도드라져 있다. 다른 설명이 없어도 그 자체가 에로틱하다. 남자가 선홍빛 입술에 눈길이 멈추는 것은 시각에 먼저 반응하는 속성 탓이다. 도발적으로 내민 입술에 유혹의 눈빛까지 더 해지면, 남자의 신경은 곤두선다. 아이섀도로 눈빛이 살짝 가려져도 그 입술만으로도 남자의 목이 마른다. 여자가 속살을 살짝 드러낸 듯 얼굴이 붉어지고, 눈길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한다. 하얀 얼굴과 붉은 입술이 만들어 낸 대조가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입술이 살짝 움직일 때마다 심장 박동은 더 빨라지고, 머리는 어질어질하다.

  핸드백에서 립스틱을 꺼내 들고, 빨간 봉오리를 동그랗게 오므린 입술에 문지르면 창백한 여자의 입술엔 불그레하게 생기가 살아난다. 작지만 위대한 립스틱이 부린 마술이다. 마술사의 스틱이 순식간에 꽃으로 변하듯 립스틱을 드는 순간 입술도 매혹적으로 변해 남자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립스틱이 요술 방망이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입술(lip) 지팡이(stick)라고 이름을 지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립스틱을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명칭은 루즈였다. 프랑스어의 후즈(rouge.붉은)에서 나온 이 말은 붉은 립스틱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립스틱 색깔이 다양해진 탓인지, 립스틱의 기능을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 요즘 루즈라고 말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립스틱은 피부를 보호하는 다른 화장품과는 속성이 다르다. 여자가 바른 립스틱 반 이상이 남자의 입으로 들어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것을 보면 속성의 차이가 분명하다. 여자가 오로지 한군데만 화장한다고 할 때, 가장 먼저 손이 가는 화장품이 립스틱이라고 한다. 지하철 출근길에서도, 밥 먹고 난 식당에서도 어느 곳이든 나이와 관계없이 꺼내 드는 것이 립스틱이다. 여자의 입술이 최우선 순위란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왜 입술일까? 말하고, 먹는 역할만 하는 입이라면 굳이 화장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밥 먹기 전 립스틱을 바르는 여자를 보지 못했다. 대신에 밥을 먹고 난 후, 대부분 여자는 립스틱을 입술에 바른다. 입의 역할이 바뀌었다는 사실과 함께 자신이 생기발랄해졌음을 알리기 위함이다. 입술은 원초적이고 무의식을 간직한 신체 일부이다. 립스틱이 입술을 터치하는 순간부터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앵두 같은 입술을 가진 여자가 미인이라는 속설 때문인지 우리나라의 옛 여인도 입술에 붉은 연지를 찍었다. 경기가 나쁘면 여자들은 빨간 립스틱을 선호한다고 한다.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빨간색 립스틱 하나만으로 자신을 연출해 보이려는 심리 때문이란다. 어느 화장품 회사는 립스틱 판매량으로 경기를 가늠하는 립스틱 지수까지 만들어 냈다. 예나 지금이나 경기가 좋든 나쁘든 입술을 도드라지게 하려는 여자의 심리는 변하지 않았다.

  립스틱은 어린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가장 먼저 손을 대는 엄마 화장품이다. 작고 예쁜 케이스에 감춰진 립스틱, 아래를 살살 돌리면 속살이 삐죽 나오는 모습이 신기하고 갖고 놀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립스틱을 갖고 노는 모습이 냇가에서 멱을 감다 바위에 앉아 장난치는 사내아이들 모습과 닮았다. 

  어른이 된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 선물 목록 상단에도 립스틱이 위치한다. 주머니에 넣어도 티가 나지 않아 은밀하게 손에 쥐여 줄 수 있고, 고르기도 수월하다. 화장품이지만 화장품 같지 않은 립스틱, 여자의 화장품이 아니라 나를 위한 화장품이다. 바람결이 바뀌는 초여름, 선홍빛 립스틱 짙게 바른 여자 때문에 내 마음속에 바람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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