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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풍 박석준 Jul 15. 2020

인연(因緣)

   

   최명화가 연주하는 인연(因緣)을 들을 때면, 달빛 아래 해변으로 밀려오는 파도가 댓잎에 떨어지는 빗방울로 바뀌는가 하면, 땀에 흠뻑 젖은 경주마의 거친 숨소리가 어느새 울타리 거미줄에 살포시 내려앉은 이슬이 된다. 피리 소리가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둔 옛 기억, 인연(因緣)의 한 끈을 끄집어낸다. 풀 향기 나는 머릿결을 살랑대며 걸어가는 그를 만나고, 마음을 설레게 한 속삭임이 귓가에 맴돈다. 초저녁 지렁이 우는 소리와 이른 새벽 마당에 깔린 안개도 다시 만난다.      


거친 숨소리 

내딛는 발자국 소리 

보이는 건 앞으로 난 길 하나

검은 나무는 그냥 지나친다

머릿속을 흔드는 수많은 말

마음속엔 같이 있다는 그 말

뛰는 가슴

 얼굴을 감싸는 뜨거움

황색 가로등 따라 내려가면

그가 날 반겨 줄까    


  내 속을 보여주지도 못한 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틀림없이 후회할 것 같았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가 더 보고 싶었다. 그가 나를 외면하든,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서든 상관없이 마주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삶을 재미없게 만든 외로움을 끝내고, 순수함과 따뜻함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커피 한 잔을 비웠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십여 분을 더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괴물의 실체를 파악하지도 못했다. 혼자 갈 길을 가겠다고 해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한 그가 자리에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희망이 보였다.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날, 나를 가로막는 그를 밀치고 들어가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그에게 안겨 주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살며시 빠져나왔는지도 모른다. 그가 겪는 아픔을 외면하고, 마음에 상처만 남겼음이 분명했다.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의 실체를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날마다 그를 쫓고만 있었다. 처음 문을 두드릴 때부터  그에게 상처를 입힌 내가 고통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어찌 보면 고통의 실체를 외면했다는 것이 더 큰 고통을 준, 또 다른 그의 마음속 괴물로 자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그냥 맘을 내려놓아

그럼 편해질 거야

다가오지 말고

그대로 거기에 있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마당으로 내려온다. 풀섶의 이슬도 모습을 감춘다. 피아노에 실린 피리 소리가 잦아든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를 고요함이 채운다. 괴물도 꼬리를 내리고, 돌덩이도 산산이 부서져 버린 듯 가슴엔 살랑대는 바람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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