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8가지 성장 프로그램, 연재⑦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주의 깊게 봐온 사람들은 묻곤 했다.
“무슨 일 있어?”
“왜?”
“우울해 보여서.”
“아닌데.”
나는 ‘무슨 일 있어?’ 이 말을 아주 싫어했다. 없으면 없다고 하면 되는데, 표정으로는 내 안의 무슨 일을 숨길 수 없었나 보다. 최근에 같은 질문을 부쩍 많이 받았다. “그래, 나 우울증 걸렸어.” 나는 서슴지 않고 말해 버렸다.
나 우울증 걸렸어, 예전 같으면 우울했다고 해도 절대 할 수 없는 말이다. 내가 우울한지도 몰랐고, 우울을 인정하면 안 된다. 일찍 철든 사람은 쓸데없이 우울해하지 않고, 우울은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의 게으른 감정 소모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 갱년기잖아.” 갱년기는 중년여성이 낯선 감정을 방어하기에 가장 좋은 핑곗거리다. 내면의 문제를 외부로 돌려버리는 것으로 내면의 탐색도 피해버리게 된다.
내가 나를 탐색하고 이해했다고 갑자기 존재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나도 모르는 삶을 살지는 않을 거다. 나는 내가 억압한 어린이다움을 남편에게서 봤고, 남편은 남편이 억압한 어른다움을 나에게서 봤다. 그래서 원수가 됐다. 남편과 꼬여있는 관계의 베일을, 최소한 의식으로는 벗겼다. 그렇다고 관계가 다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남편의 어린이다움을 도닥거리면서 남은 반평생을 살 자신은 없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로 내 인생이 다 소진해 버릴 것 같다. 남편은 잘난 척으로 표현되는 나의 어른다움에 질색하고 있었다.
나를 알아간다고 갈등이 집단의 도덕적 기준에 따라 술술 풀리는 것은 아니다. 이혼 위기의 부부가 부부 상담으로 이혼하지 않을 수 있고, 이혼이야말로 부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임을 자각할 수도 있다. 알 수 없었던 것들이 아는 것으로 되면, 심중의 오리무중에서는 빠져나온다. 그 상태에서는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이즈음에 내가 꾼 꿈이다.
“나는 완만한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그곳은 내가 좋아하는 튤립꽃으로 만발한 정원이다. 나는 생시인 것처럼 가슴이 설렜다. 그 맞은편에는 잡초도 있었다. 나는 그 잡초를 다 뽑아야 하나로 망설였다. 음성이 들려왔다. ‘잡초는 거름이 된다.’ 잡초를 뽑을 필요가 없어졌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러기로 했다.”
꿈에서 깨자마자 바로 잠에서 깼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꿈이라고 하기는 너무 생생했다. 꿈은 보통 흑백으로 나오는데, 튤립꽃의 고운 색감이 눈앞에 선하다. 잡초도 거름이 된다는 말의 여운이 강하게 남아있다. 양가감정? 인류의 공동작업이 양가감정이란 P의 말이 떠올랐다.
튜립꽃과 잡초, 이것은 내 안의 모든 양감 감정의 상징이 아닌가. 나에게 일찍 철드는 것은 튜립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잡초였다. 나는 잡초를 뽑고 나의 튤립을 꽃 피우는 데에 열중하며 살았다. 잡초에서 영양분을 취해야 하는 나의 튤립은 빛깔이 곱지 않았다. 그렇다고 잡초가 없어진 것도 아니다. 나의 잡초는 그늘진 어딘 가에 숨어있어 나도 모르게 또 다른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나라는 존재는 내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이, 마차의 양 바퀴처럼 하나로 굴러간다는 깨달음이 왔다. 순간 오랜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기분이었다.
여자는 똑순이여야 인정받는다는 어린 시절부터의 신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좀 멍청하면 어때.” 꿈에 의하면 멍청함은 똑순이의 거름이다. 멍청도 해야지, 그 뜸에 나를 대하는 다른 사람도 숨을 쉰다. 여성의 멍청은 남성에게 매력도 되더라. “당신은 정확해서 좋아.” 수없이 들어왔던 이 말, 인공지능이나 들을 말이다. 인공지능은 감성이 없다. 나는 그 말을 신봉하고 살았고, 직장에서는 그 덕을 봐서 조기 승진도 했다. 그러나 모든 손익 계산서를 펼치면 나는 남는 장사를 했을까? 남편에게 별난 사람이란 말을 듣고 딸에게는 냉혈동물이란 소리를 듣는다. 직장 상사는 나를 좋아해도 동료나 아랫사람은 나를 불편해한다. 무엇보다도 내 표정이 점점 마네킹이 되어 갔고, 우울과 허전은 내 중심 인격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튤립과 잡초 꿈에 대하여 P와 충분한 이야기를 나눈 후 나에게 중요한 변화가 왔다. 우선 내가 나를 대하기가 편했다. 남편에게 ‘저 남자 왜 저래’가 아니라 ‘저 남자는 저럴 수도 있구나’가 됐다. 그 밖에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저 사람은 저럴 수도 있구나’로 변했다. 마치 내가 그런 것처럼. 언니와 남동생을 전보다 더 이해하게 됐고, 부모에 대한 막연한 존경심은 평범한 관심으로 변했다. 내 마음속의 튜립꽃과 잡초, 나는 이 두 개를 인정하기로 했다. 서로 다른 두 개를 하나로 엮는 통합의 작업은 끝이 없다. 어쩌면 죽어서도 계속되는 작업일지 모른다. 마침내 둘이 하나로 만날 때에 삶은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