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세, 사랑이 뭘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지구의 인구수만큼 있다. 쉽게 물으면 쉽고 어렵게 물으면 어렵다. 나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대 삶의 바닥까지 내려가 봤는지 묻고 싶다. 당신의 ‘무엇’을 얻지 못하면 이제는 살기 힘든 삶의 위기에 봉착해 봤는가. 눈물로 밤을 새워보지 않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괴테의 말도 생각해보자.
대답은 흔한 곳에 있다. 흔하게 듣는 대중가요에서, 흔하게 보는 인기 영화에서,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흔한 말속에 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조실부모했고 아버지처럼 의지한 형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서 우울증과 죄책감,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 염세적 태도를 버리지 못한 톨스토이는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고 했다.
그가 발견한 사랑은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언어가 아니라 삶의 심연에서 끌어올린 진주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말이지만, 쉽게 나온 말이 아니다. 그가 유랑생활에서 발견한 삶의 결정체는 사랑이었다. 그가 그런 사랑을 실천했느냐 못했느냐는 큰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어떤 말이든 그의 존재에서 나왔으면 다 진실이다.
길고양이 어미가 두 마리의 새끼를 데리고 아파트 화단을 배회하는 것은 한 주민이 봤다. 그는 고양이 사료와 물을 시간에 맞추어 거기에 배달해 줬고, 고양이 모자는 어김없이 그 시간에 화단을 찾아왔다. 사람과 고양이 사이에 따뜻한 교감이 일어난 거다. 어느 날 아침 새끼 한 마리가 화단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동물병원에 고양이 새끼를 데리고 갔다. 수의사는 사람의 발길에 차여 늑골이 부서졌을 거라고 했다. 그는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고양이를 치료했다. 치료한 후에는 다시 길로 보낼 수 없어 집에서 키우기로 했다. 사랑은 따뜻한 관심이다. 따뜻한 관심은 희생 없이 할 수 없다.
가족은 사랑과 미움의 양가감정을 온몸과 마음으로 부딪치면서 마침내 사랑을 배우는 기초공동체이다.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가족주의에 안착하려는 유혹은 항상 있다. 가족주의가 곧 행복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착각은 반드시 무너진다. 그래서 인류의 대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가족을 떠나거나, 결혼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족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가족을 떠나 대의를 구현하는 일은 더 힘들고, 그들은 세상의 빛이다.
아무리 가벼운 말이라도 영혼을 담아 말하면 따뜻한 관심거리가 된다. 간단하다. 상대의 얼굴을 보고 다정하게 그리고 짧게 말하면 된다. 아파트 층간소음으로 갈등이 좀 있었다고 해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 가볍고 친절하게, 그리고 따뜻한 인사 한마디면 풀린다. 아무리 멋진 말이라도 상대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독백이다. 길게 말하면 충고이다.
사랑은 여백을 남겨두고, 그 여백을 함께 채워가는 거다. 독백이나 충고는 스스로 사랑이 결핍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채워야 할 관계의 여백을 혼자 채우는 독선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큰돈을 희사했다고 하자. 희사한 사람은 자신과 가난한 사람 간의 여백도 채우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그는 조용히 물러나야 한다. 그 여백은 가난한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덕으로 채우게 해야 한다.
사랑을 미루면 그 자리에 원망이 들어선다. 원망은 정신 에너지를 과거로 퇴행시킨다. 원망으로 얻어지는 것은 몸과 마음의 질병이다. 사랑은 지금 여기서 당신이 지향하는 것에 있다. 19세기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가 파가니니는 초인적 기교를 가졌다. 한 연주회에서 바이올린 줄이 하나 끊겼다.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연주를 했다. 두 번째 줄이 끊어지고 세 번째 줄이 끊어져 마지막 한 줄이 남았어도, 그는 즉흥 연주로 청중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 하는 일에 지향하는 사람에게 실수는 있어도 실패는 없다. 파가니니는 자신의 연주와 바이올린을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 분야 대가가 될 수 없다. 당신이 가진 인간적 약점, 당신이 지금 당장에 처한 힘든 일들, 복잡하게 꼬인 인간관계, 이 모든 것들의 열쇠는 지금 여기로 지향하는 사랑이다.
상대는 치밀하게 준비했는데 그는 자신의 정직 하나를 믿고 있다가 실형을 받았다. 그의 정직성을 믿은 사람은 그를 면회했으나, 오히려 위로받고 돌아갔다. 그는 그를 고소한 측과 검사과 판사를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은 원망만 낳을 뿐이다. 원망하지 않는 그의 정신 에너지는 현재로 모인다. 그는 교도소에서 할 일을 찾았다. 워낙 독서량이 많았던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교도소에서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는 교도소 안에서 랍비처럼 수감자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됐다. 그에게 수감자들은 죄인이 아니다. 인생의 한 과정을 함께 사는 사랑의 대상이다. 그는 교도소 밖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마음순례 박성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