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죽어갈 때에, 그의 됨됨이도 드러난다
죽음의 심리학
죽은 자가 살아있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요. 그것은 누구를 위한 슬픔일까요. 당신은 사후생을 믿고, 사후에는 모든 점에 있어서 여기보다는 더 나을 것이라 믿는 사람입니다. 먼저 세상을 떠나서 좋은 곳에 있을 아들이, 아직 지구에 남아서 남은 고통을 채워야 할 당신을 위해서 기도할 겁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꽃도 피지 못하고 떠난 아들만 생각하면 엄마로서 아들의 인생이 불쌍하다고요. 꽃을 피우지 못하다뇨? 그럼, 아들은 꽃 피울 준비만 하고 세상을 떠난 겁니다. 당신의 꽃은 대체 무엇인가요? 판사, 의사, 교수, 기업가, 성공한 운동선수, 연예인이나요? 사람은 각자의 꽃을 피우려 애쓰는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로 이미 충분한 꽃입니다. 지구에는 지구 인구수만큼의 꽃이 피어있습니다. 막 태어난 아기도 그만의 고유한 꽃의 형태와 향기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활짝 핀 꽃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모양, 향기, 빛 등이 다를 뿐입니다.
당신은 떠난 아들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닙니다. 당신 마음 안에 있던, 당신과 동일시된 아들이 당신을 떠나서, 그 빈자리가 허전해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아들 먼저 떠나서 허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빈자리로 허전합니다. 산 사람은 죽은 사람 때문에 슬퍼하지 않습니다. 다 자기의 허전하고 울적한 마음으로 슬퍼하는 겁니다. 사람이 그렇게 구조화됐습니다.
죽음은 가장 평등하고 공평하다
배우자를 떠나보내고 슬픔을 견디지 못해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부애가 너무 좋아서 그렇다고 미화합니다. 천만에요. 부부가 성숙한 분리를 못 해, 서로 유아적 의존의 감정으로 얽혀 있어서 그렇습니다. 어린아이는 문제 해결을 못 하면 웁니다.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당신에게 이런 해석은 잔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근본적 물음일수록 잔인한 해석으로, 세상에 대한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문제 자체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보는 태도가 바뀌는 겁니다.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하고 평등한 것은 없습니다.
누구는 지명도 있는 대학에 가고, 누구는 지명도가 없는 대학에 간다면 억울해합니다. 누구는 연봉이 일억원이고, 누구는 오천만 원이라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낍니다. 누구는 금수저이고 누구는 흙수저라면 타고난 불행이라 합니다. 이러한 판단이 다 오류이지만, 죽음은 공평하고 평등합니다. 우리는 죽어가거나 죽은 사람 앞에서, 그의 지구학교 졸업을 축하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람이 죽어갈 때, 그의 됨됨이도 드러난다
사는 것은 고통입니다. 전쟁터나 다름없는 이 세상에 영원히 사는 것만큼 고역이 또 어디 있겠습니다. 저의 임종 환자 돌봄의 경험에 의하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곧 그의 됨됨이였습니다. 정부 고급관료로 평생을 지낸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침대에 실려 수술실로 가면서, 아내에게 한 말입니다. “여보, 돈 봉투. 의사들 촌지를 줘야 해. 어서.” 아내는 어이없어했습니다. 평생 정부 고위 관료를 지낸 그분의 됨됨이가 그랬습니다. 그분은 수술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 죽어서도 같은 세계관을 가진 영혼들끼리 군집을 이루어 돈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을 겁니다.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도 가족 외에는 자신의 병환을 알리지 않는 분이 있었습니다. 저와는 매우 밀접한 사이인데도, 그분은 병환을 숨겼습니다. 그분은 저의 전화를 매우 반갑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언제 한번 볼 수 있으면 좋다고 말했고, 평소와 같이 일상 이야기만 하다가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때가 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라니!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그분의 됨됨이가 그랬습니다. 그분은 누구에게나 다 찾아오는 죽음, 두려움 없이 담담히 맞이하겠다고 평소 말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시신을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했습니다. 가진 것이 있다면 다 내놓고 가겠다는 평소의 말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분의 사람 됨됨이가 그랬습니다. 그분은 죽어서 욕심 없는 따뜻한 심성을 가진 영혼들끼리 군집을 이루어, 거기서도 영적 성장을 위한 일을 할 것입니다.
죽어가면서도 미워하는 사람을 끝까지 미워하는 사람이 있고,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으로 품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은 죽기 직전에 가장 많이 변한다는 심층 심리학적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봐도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삶에 대한 태도로 죽음을 보니, 죽음이 두렵고 죽음 준비도 미처 못합니다. 죽음을 죽음의 세계관으로 보는 태도를 배운다면 죽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죽음은 영원을 사는 존재의 한 부분입니다. 어떻게 죽음을 죽음의 세계관으로 볼 수 있을까요? 세상이 본체의 그림자라는 인식부터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