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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월 Aug 28. 2020

개구리들은 너무 쉽게 올챙이들을 무시한다.

학술 용어, 전문성, 그리고 페미니즘

분명히 이전에는 차근차근 쉬운 말로 시작했다. '가' 다음에 '나', 그다음은 '다'입니다. 자 따라 해 볼까요. 가나다라마바사. 그런데 어느 순간 나도 그렇고 주변도 그렇고 모두 이걸 다 외워버리고 맥락과 상황을 이해해버리니 더 이상 앞에 사용했던 설명을 할 필요 없이 한 가지 용어 또는 단어로 바로 그 상황을 일축해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래디컬 페미니스트, 터프 논의에서의 '성기 환원주의'나 소수자성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당사자주의', 아니면 쉽게는 '우한 폐렴'이나 '여성은 꽃이지' 따위의 말들. 


생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것의 맥락을 알려주기란 쉽지 않다. '성기 환원주의'를 설명하려면 일단 환원주의라는 단어부터 설명해야 하고, 이것을 이해하면 이제 성기(sex)는 과학적(생물학)인 현상이 아닌 사회문화적으로 두 가지 성기가 있다는 환상에서 시작된 구성물이다, 라는 설명을 곁들여야 한다. 그런데 이런 설명 또한, '아니 XY, XX 염색체 버젓이 있는데 그게 무슨 귀신이 오후 2시에 출물하는 소리야' 같은 반박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이제 '남성이라고 다 xy로 염색체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xx가 있을 수 있으며, 염색체의 분류는 복합적이다'라는 재반박을 하게 되고 여기어 덧붙여서 '인터섹스(두 가지 성기를 갖고 태어남)인 사람도 있으며, 성기를 보고 남성인 줄 알았는데 커가면서 여성으로 분류되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종종 있다'라는 설명을 추가할 수 있다. 그럼 또다시 이 사람은 '그런 경우는 특수 케이스이고 정상에서 벗어난 예외 상태잖아'라고 말할 수 있으며, 거기에 반박하고자 '그 사람은 그 사람의 몸으로 태어난 것이지 비정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반례가 있다는 것이 즉 두 가지 성을 가르는 기준이 인위적이고 구성적이라는 것을 역설한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아울러 여기에 '그럼 성소수자 역시 소수이고 비율이 적은데 그럼 이것은 비정상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는데 이 질문에 '당연하지. 성소수자는 정상이 아니야'라는 대답을 한다면 이 대화는 다른 국면을 맞게 되며 더 큰 고비로 넘어가게 된다. 이처럼 성기 환원주의를 설명하려다가 상대방이 퀴어 포빅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게 된다. 글로 쓸 때야 혼자서 생각도 하고 이전에 봤던 책이나 논문을 참고할 수도 있지만 실제 대화 중에서 이런 상황을 맞닥트리게 되면 당황하여 어떤 말도 못 한다. 이에 상대방은 자신의 언변에 말문이 막힌 줄 착각하고 그렇게 씩씩대며 당황하는 순간 대화가 아닌 싸움으로 전환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주로 하는 것은 대화가 아닌 가르침이다. 이걸 몰라? 그러면 더 배워. 그 책 읽고 이것도 읽고 와. 이렇게 말하는 전제는 '난 옳고 넌 틀리다'이다. 그러니 상대방 또한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좀 더 아는 사람은 토론과 대화보다는 가르침을 보여주고, 잘 모르는 이는 지가 뭐 좀 안다고 날 이렇게 무시해도 되나? 싶은 서운함에 상처 받게 된다. 


나 역시도 하나를 알고 그다음 걸로 넘어갈 때 많은 고통을 치렀다. 나는 이미 익숙해져서 다른 이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세미나에서나 아니면 다른 직장인 친구에게 설명할 때 말문이 바로 막힌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아니면 내가 설명하는 게 맞는 건지. 나는 지금 가르치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주장을 하려는 건지. 이미 내 마음속으로는 '내가 맞고 넌 아직 몰라'라는 태도를 하고 있는지. 누가 더 옳다고 선행된 상태에서 논쟁이 가능한지. 이것을 토론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렇다고 조리 있게 설명한다고 해도 언제나 성공적이지도 않으니. - 나는 결국 입을 다문다.


입을 다문다고 해결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굳이 뭘 해결해야 할 필요도 없거니와 성공적이라고 해서 무엇이 해결되긴 한 건가. 개인에게 너무 큰 부담을 지우지는 않았는지 나는 내 길일 있듯이 이들에게는 이들만의 길이 있고 이들의 전문성을 내가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으니. 큰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내버려 둬도 저 정도면 배려하고 다정한 삶을 살고 있으니 더 많이 배울 필요도 없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또 이렇게 평가하고 재단하고 있는가, 싶은 그런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그래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이 사람이 이 부분에 대해서 더 듣고 싶은가?'이다. 이 사람이 배우고 싶고 나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가르치지 않고' 내가 아는 것을 '쉽게' 설명해야 한다. 그 사람이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다른 방향으로 간다고 해서 화를 내면 안 된다. 나 역시도 오랫동안 생각하고 반추한 후에 갖게 된 가치관이므로. 또한 나 역시도 틀릴 수 있으니 상대방의 질문에 모르면 그 부분은 모른다고 설명해야 한다. 내가 상대방의 말을 해석하는 것 역시 나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니, 왜 저렇게 이상한 질문을 하지, 보다는 그 사람은 왜 저렇게 생각했을까 하고 역지사지의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쉬운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역량 부족이니 쉬운 설명을 달달 외워서 콕 찌르면 바로 입에서 술술 나오도록 공부해야 한다. 어떤 이들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정말 멋진 설명이지 않을까. 


그렇게 함께 배워나가는 것이다. 나 혼자 배웠다고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 역시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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