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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Jul 31. 2020

일본에는 일본식의 불교가 있다

(일본영이기1)

        

 일본에서 살 때, 오래간만에 동네의 한국식당, 야키니쿠(焼き肉, 불고기) 집에 갔던 적이 있다. 

들어가니, 우리 동네 절의 스님이 아들, 딸 데리고 와서 불고기를 먹으며, 반주까지 곁들이고 있었다. 동네 절의 식구들인데, 그 스님은 절의 윗대 스님의 아들이자 절의 주지였다. 동네 사람들의 상담역이나 장례, 법회 등을 보아주며, 그 댓가인 후세(布施)를 받아 일가의 가계(家計)로 절이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스님들은 어째서 이런  '세속적'인 모습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걸까? 의문이었다. 

살펴보자니, 이는 일본 사회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유포되기 시작했던 초창기 시절의 모습과 사실상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 최초의 불교 설화집 <일본 영이기>(9세기 초 성립) 속에도, 이처럼 가족과 생계 속에 번뇌하던 승려들의 모습이 엿보인다.      


    승 경계(景戒)는 참회의 마음을 일으켜,"……아 부끄럽구나. 세상에 태어나 생명을 이어가고 생존할 방법에 없다. ……속가(俗家)에 있으면서 처자를 부양할 것이 없고, 변변찮이 먹을 것도 없고, 소금도 없고, 의복도 없고, 땔감도 없다. 모든 것이 없어서 우려로 인해 내 마음이 편치 못하다……”(하 38)     


승려가 되었어도 속가에 살면서 처자를 부양하고 살았던 사도승(私度僧), 또는 승려의 이야기는 많은 기록을 통해 전해 온다.     


노승 관규(觀規)는……학식 있는 득업(得業)으로 많은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세속에 살면서 영농을 하며 처자를 부양했다……칭찬하여 이르길 "아……안으로는 성인의 마음을 갖추고, 밖으로는 범인의 모습을 하고, 세속에 있어 색(色)에 접하면서도 계율을 더럽히지 않았다.……정말로 알겠다. 이는 성인으로, 범인이 아님을.”(하 30)     


이처럼 승려가 되었어도 ‘세속에 살’ 았던 것이 결코 그의 ‘성심(聖心)’을 폄하하는 요인으로 평가되지 않았다. 물론 당시 세속을 떠나 수행하는 승려도 있었으나, 이처럼 세속에 살면서 처자를 거느리는 것 자체가 결코 그들의 신심(信心)의 차원의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사회는 출신에 따른 계급사회였다. 하급씨족 출신은 조정의 중심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다. 그러한 하급씨족 출신이 조정의 관직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승려가 적극 배출되었을 거라는 견해도 있다(川尻秋生 <寺院と知識>). 즉 일본 재지 사회에서의 불교의 민간보급의 모습에는, 신앙이나 사상이라는 차원이전에, 삶의 방편과 긴밀한 관련성이 있는 것이다. 


승려란 분명 불교라는 종교의 보급 결과이다. 그렇지만 <영이기> 등을 통해 보이는 이들 승려의 모습에는 형이상학적 사상이나 신앙으로 고뇌하는 모습보다는, 생활형편상으로 고뇌하는 승려의 모습이 보편적이다. 이는 일본인들이 받아들인 불교가 삶을 영위하기 위한 방편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되지 못하였다는 점을 알려준다.

     

 <일본 영이기>를 저술한 승려 경계(景戒)는 본디 사도승 출신이다. 사도승은 본래 일본 고대국가의 율령법에서 금지된 신분이었다. 


‘사적으로 입도 및 도(度)하는 자는 장(杖; 곤장) 1백, 이미 편호(세금 내는 백성)에서 빠진 자는 도(徒;징역) 1년 형’에 처해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승려가 되려는 자는 관의 허가를 필요로 하는 관도제였다. 관도승이 되면 국가의 과역으로부터 벗어나 안정된 신분으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조건과 신분상 관도승이 되기 어려웠던 많은 민중들은, 자의적으로 머리를 깎고 법복(승복)을 입고 승려 흉내를 내며 그 생계를 영위하였던 것이다. 

     

914년 미요시 기요유키(三善清行)는 조정에 다음과 같은 의견서를 올린다(일본사상대계 <고대정치사회사상>).


 여러 지역(諸國)의 백성들이 과역을 회피하고, 조조(租調, 세금)를 피하려는 자가 사적으로 마음대로 머리를 자르고 멋대로 법복(승복)을 입습니다.……천하 인민의 3분의 2가 모두 머리를 깎은 자들입니다. 이 모두 집에 처자를 두고 입으로는 비린내 나는 물고기, 짐승의 고기를 먹습니다. 모습은 사문(沙門, 승려)을 닮았지만 마음은 도륙자와 같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심한 자는 모여 군도(群盜)를 이루고……만일 고쿠시(國司;지방관)가 법에 따라 처단하려고 하면 안개구름처럼 모여들어 싸우고 폭동을 일으킵니다.……    


9세기 이후 헤이안 시대, 민간인 출가는 거의 유행적 현상이었다. 이로 인해 지방의 촌당(村堂), 암실 수가 격증하였다는 연구도 있다(永原慶二 <アジア のなかの日本文化>). 


승려가 되면 세금을 내지 않으니 과역민의 손실을 우려하면서도 사실상 당시의 일본 조정은 사도승 근절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청컨대 천하에 두루 알려 국내에 살지 못하게 하고……본래의 신분으로 돌려보낼 것을 원합니다(<속 일본기>759년 5월 9일)라고 말하는 간고지(元興寺) 교현(敎玄) 법사의 청원에 대해, 조정은


 “(그) 의견은 한풍(漢風;중국풍)에 의한 것으로 일본의 풍토에는 맞지 않는다.……관부(官符, 태정관부)를 내린다 해도 세상에서 행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을 뿐이다. 


승니령(僧尼令)이나 호혼률(互婚律)에 명시된 사도승 금지의 조항을 조정 스스로가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정사의 기록을 살펴보아도 승니령에 따라 처단되거나, 그 위반으로 처벌받은 사례는 단 1건도 확인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도승이 일반 관승처럼 공문서에 서명하거나, 경계나 행기(行基)처럼 사도승에서 정식의 관도승으로 영전된 경우도 많았다. 

일본 조정의 공적 태도는  "현실은 현실대로 용인한다"였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후로도 사무라이 시대를 맞이해 불교(그 외피적 모습)는 더욱더 번성한다. 

17세기 에도시대가 되면 기독교 금지령과 부합되어 무사, 농민에 관계없이 어느 절인가의 단카(檀家, 불교신자)로 등록될 것이 강요되었다. 즉 단카의 등록부가 민중을 파악하는 호적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영향으로 인해 일본인들은 오늘날까지 대부분 어느 절인가의 단카로 등록되어 있어, 죽으면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게 된다(불교식으로 장례 치루는 비율 85%. 신도식 4% ;<pen books<神社とは何か?お寺とは何か> ).  불교는 일본인의 역사, 생활, 문화 전반에 걸쳐서 그 영향이 컸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일본을 불교국가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역사상 승려가, 사원이 제아무리 많았다 하더라도 그 나라를 과연 '불교국가'라고 불러 마땅한가는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 받아들여지고 이해된 불교는 '해탈'이나 '깨달음','구원'과 같은 형이상학적 이념을 추구하는 보편 종교로서의 모습이라고 보기 어렵다. 예나 지금이나 민간의 세속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도구의 하나로서, 현세적 목적 속에서 이해되고 활용되는 면이 컸다는 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 어떤 고차원적 내용의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그 나라만큼의 환경조건 속에서, 그 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맞는 식으로 이해되고 정착되는 것이었다.     

    

*<일본영이기>;정식명<일본국 현보 선악 영이기(日本国現報善悪霊異記)>. 야쿠시지(薬師寺) 승려 경계(景戒) 편찬. 성립은 787년경까지 전체 골격이 형성되고 그 뒤 증보되어 822년경 완성된 것으로 추정(『日本霊異記』, 多田一臣校注. ちくま 学芸文庫,1997 참고).

 

**참고 <일본고전문학대계 일본 영이기>(岩波書店,1967). <일본 영이기>는 본래 민간 불교자에게 설경(說經)의 종본(種本)을 제공하기 위해 편찬된 것이었으나, 10세기의 귀족사회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았던 책이었다(河音能平<律令国家の変質と文化の転換>). 불교 설화집이면서도 전적으로 불교적이지 않으며, 당시 사회의 지역과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점이 많다(吉田一彦,<日本霊異記』の史料的価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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