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의 중국 통일 이후 황제가 만민을 대상으로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정치 체제, 즉 황제 전제 체제가 성립되었다는 설명은, 이 학설을 지지하는 학자들도 역사적 사실과 배치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예컨대 한문제때 지방 제후왕들의 세력은 중앙 정부와 항쟁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고, 한무제 이후에야 비로소 중앙 권력은 지방 세력을 실제로 통제할 수 있었다.
기실 한문제의 권력은 한고조 유방보다 약했다. 우선 여후를 패망시킨 이는 한무제가 아니라 한고조 유방의 서장자인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의 아들들과 주발周勃과 관영灌婴 등의 대신들이었다. 하지만 제도혜왕 유비의 장자인 제애왕齊哀王 유양劉襄의 외척 세력이 상당히 강했다. 대신들은 만약에 제애왕 유양이 황제로 등극한다면 그의 외척 세력이 대신들이 차지해야 하는 권력을 탈취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래서 외척세력이 비교적 미약한 대왕代王 유항劉恆으로 하여금 어부지리를 얻어서 한문제로 등극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한문제 즉위 후 이루어진 논공행상에서 여후를 패망시키는데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주허후朱虛侯 유장劉章과 그의 동생 제북왕濟北王 유흥거劉興居는 제나라의 군 하나만 수봉받았다. 당연히 유장과 유흥거는 불만을 품었다. 유흥거는 한문제 3년 흉노가 중원 북쪽 변경을 노략질하는 것을 틈 타 반란을 일으지만 실패하여 자살했다. 유흥거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 제후왕들도 실질적으로 독립을 유지할 정도로 세력이 강력했고, 회남여왕淮南厲王은 심지어 황제를 참칭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한문제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다음의 정책을 펼쳤다. 우선 가의賈誼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방 제후왕들의 봉지를 삭감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제나라는 여섯 나라로, 회남국은 세 나라로 분할하였다. 그런데 이는 한문제의 권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제후왕들이 중앙정부의 지시를 따른 것이 아니다. 다만 제후왕들이 모반을 일으키거나,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추진될 수 있었다. 즉, 한문제 초기 제후왕의 봉지 삭감이 성공은 시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문제의 뒤를 이은 한경제漢景帝도 즉위 초 제후왕들의 봉토를 삭감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오왕 유비劉刘濞를 필두로 제후왕들이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지방제후왕들의 세력은 오초칠국의 난이 진압된 뒤 비로소 실질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들은 봉지가 삭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 관리임면권, 군사권을 박탈당하고, 그리고 재정 수입 경로도 제한당했다.
한경제가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하기 이전에는, 황제가 전 중국의 모든 인민들을 대상으로 절대권력을 휘두르지못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에 황제 전제 체제가 바로 완벽하게 성립되었다는 전제 아래에서 당시의 제도들을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한경제가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하기 이전에 지방 제후왕들이 자체적으로 수립된 행정 체제를 통해 자신들의 인민을 통치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배치된다. 뿐만 아니라 한경제 이후에도 전한 황실은 행정 체제를 통해 지방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예컨대 이성규 교수는 출토자료를 자세히 분석한 뒤에 전한 중기까지 지방이 중앙에 올리는 통계 보고는 거진 모두 거짓이었지만, 중앙 정부는 거짓 보고를 찾아낼 능력이 부족했으며, 설사 찾아냈다고 하더라도 늘 묵인했다고 지적했다. 요컨대 전한 황실은 기본적으로 행정 제도를 통해 지방을 감시할 능력이 부족했다. 따라서 만약에 어떤 지방을 철저하게 통제하려면 군사력에 의존해야했다.
그런데 전한 초 황제들은 지방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군사력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했다.
《한서漢書-진희전陳豨傳》 : "진희는 어렸을 적에 늘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無忌를 숭모했다고 했다. 진희가 장성하여 변경을 수비하러 가자 신릉군 위무기처럼 빈객들을 불러모았다. 조나라로 보고를 하러 갈 때마다 빈객들은 그를 수행했는데, 그 규모가 수레 천 여 승이나 되었고, 조나라 수도 한단의 객사는 사람들로 꽉 찼다.... 조나라 상 주창周昌은 한고조 유방을 접견하면서 진희의 빈객들이 강성하기 때문에 외부에서멋대로 군사를 움직여서 변란을 일으킬 것 같다고 말했다."
위에서 인용된 사료에 따르면 진희는 대代나라의 상국相國이 된 이후 많은 빈객들을 불러모아, 조나라의 상인 주창은 진희가 변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한고조 유방에게 보고했다. 만약에 한고조 유방이 중국을 통일한 뒤 전국의 모든 군대를 장악할 수 있었다면 진희는 멋대로 빈객들을 불러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초칠국의 난 역시 당시 황제 권력이 지방의 군사들을 철저하게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당시 인구 상황을 고려한다면 제후왕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중앙정부보다 많았다. 따라서 한문제가 중앙군의 규모를 확충하지 않았다면,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하지 못했을 수 있다.
하지만 기존 학자들의 연구와 이론에 따르면 한문제는 중앙군의 규모를 확충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황제 전제 체제는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편 의무 병역 제도가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었고, 이에 한문제는 언제 어디서나 강제적으로 군대를 소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방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군대도 결국에는 중앙 정부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두정승杜正勝은 춘추말기 이후 각국의 징병 대상 범위는 차츰 넒어졌고, 마침내 모든 인민을 대상으로 징병제를 시행하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한편, 보다 많은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부대를 이탈하면 연대책임을 묻는 연좌제를 실시하는 동시에, 징병대상에게는 군공작제와 사유전택을 제공하는 등의 혜택도 제공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국시대 말기부터 정말로 보편 의무 병역 제도가 실시되었다고 한다면, 징병대상에게 군공작과 사유전택이라는 혜택을 제공할 필요가 있었을까? 기실 이 혜택은 일종의 보수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진말한초의 병역제도에는 모병제적 경향이 있으며, 한문제와 지방제후왕들은 각자의 병력 규모를 확대하기 위해서 서로 경쟁을 벌였다는 가설을 세웠다. 기실 한고조 유방 때 중앙정부의 재정은 붕괴했었기 때문에 방대한 군대을 유지할 수 없었고, 지방 제후왕들은 이를 틈타 자신들의 군사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이에 한문제는 군사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즉위 후 바로 중앙 정부의 재정 수입을 증가시켜야 했다. 왜냐하면 당시 병역제도에는 모병제적 성격이 짙었기 때문에 군사들에게 수익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병력을 확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문제는 한고조 시기 붕괴되었던 중앙 재정을 복구하기 위해서 어떤 방책을 강구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