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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Sep 26. 2022

1. 항우의 봉건제 부활이 과연 실책이었을까?


진시황, 항우, 유방은, 중국사에 관심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 쯤은 이름을 들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활약했을 때의 시대상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당시 사람들의 시각이 아니라 현대인의 관점으로 진말한초시기의 중국사를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항우에 대해서 겹겹이 쌓인 오해는 이를 그대로 드러낸다. 


아래는 <나무위키>에서 기록된 항우에 관한 설명의 일부다. 대중들 뿐만 아니라, 학자들도 비슷한 평가를 내릴 것이라고 생각해서 긁어왔다.


"항우는 하늘이 내린 무력과 군사적 능력, 그리고 천하의 모든 세력을 무릎 꿇린 카리스마와는 별개로 전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정치적 판단력은 최악이었다....... 분봉 문제로 괜히 척을 져서 싸우지 않아도 될 세력을 적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봉건주의로 돌아가버렸으며, 잠재적인 적들을 줄인답시고 신안대학살과 같이 민초들을 학살하고 다닌 끝에 민심을 크게 잃었다..... 항우는 "천하를 아우른다"는 의미보다는 마치 전국시대의 개념으로 진나라를 대했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고 제후들의 독립을 보장하는 봉건제를 폐지했지만, 그 후 20년도 지나지 않아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키고, 우리가 흔히 아는 초한전쟁의 시대로 돌입한다. 그리고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봉건제를 부활시켰다. 이것이 바로 나무위키에서 언급한 항우의 실책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도 오늘날 사람들처럼 항우가 진시황처럼 천하를 통일하고 군현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진시황 34년 제나라 출신 박사 순우월淳于越이 진언하였다. 

"신은 은나라와 주나라의 왕은 천 여 년을 통치했는데, 제자들과 공신들을 (제후로) 봉해서 자신들을 보필하라고 시켰습니다. 오늘날 폐하께서는 해내를 소유하고 계시지만, 자제들은 필부에 불과합니다. 물론 전상田常, 육경六卿의 신하가 있지만 폐하를 보필하지 않을 것입다. 도대체 어떻게 (폐하와 자제들이) 서로를 원조할 수 있겠습니까? 옛 것을 본받지 않아도 사업을 오랫동안 지속시킨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사기史記-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순우월은 제후들의 독립을 보장하는 봉건제를 유지하자고 주장했다. 대체로 순우월의 말은 시세를 못 읽는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된다. 그런데 전한 초 한문제漢文帝을 위해서 제후왕의 세력을 삭감하자는 계략을 세운 가의도 비슷한 말을 하였다.


"그러나 진나라가 좁은 땅에서  만승의 국력에 다다랐으니, 다른 지방의 제후들을 줄세워서 조회를 들게 했다면, 백 여 년은 유지했을 것이다.” (《과진론過秦論》)


가의 역시 진나라가 봉건제를 유지했다면 백 여 년을 유지했을 것이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초한전쟁의 주인공인 항우도 순우월과 가의처럼 정세를 판단했기 때문에 봉건제를 부활시켰다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뒤 진나라의 수도 함양은 그야말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곳이 비록 지리적으로 방어에 용이하다고는 하나, 원래 자신의 근거지인 팽성을 버린다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게임 <문명> 시리즈로 따지자면, 적국의 수도를 핵으로 날렸지만, 그곳이 방어에 용이하다고 해서, 애써 발전시킨 수도를 버리고 천도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뿐만 아니라, 항우가 논공행상을 진행시키겠다고 초회왕楚懷王에게 사람을 보내 허락을 구했을 때, 초회왕은 "맹약대로"라고 말했다. 이에 초회왕은 의제義帝가 되었고, 항우는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서, 먼저 여러 장수들을 왕으로 삼았다. (《사기-항우본기》)


비록 항우와 초회왕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맺은 맹약이 무엇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진시황처럼 한 명에게 절대권력을 몰아주는 것이 아니라, 항우와 여러 장수들이 봉토를 나누어 가지는 봉건제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흔히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가 되자 모든 중국인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절대적으로 복종했다고 하며, 이에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를 가리켜 진제국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진제국을 멸망시킨 항우와 여러 장수들은 다시금 그런 제국을 건설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초한전쟁의 승자인 유방도 한왕조를 세우면서 진시황처럼 제국을 부활시키려고 생각했을까? 


전목錢穆은 1955년에 지은 《중국역대정치득실中國歷代政治得失》에서 이렇게 말했다.


"황제는 국가의 유일한 우두머리였지만, 실제 정권은 황실이 아니라 정부에 있었다. 정부를 대표하는 것은 재상이었다. 황제는 국가의 원수로 국가의 통일을 상징할 뿐이었다. 재상은 정부의 영수로 정치상 실질적인 모든 책임을 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 몇 십 년 동안 대개 중국은 진한시대 이래 봉건정치 혹은 황제 전제 체제였다고 하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설령 진시황이 제국이라는 통치 이념과 체제를 완벽하게 건설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16년 동안만 유지된 모래탑에 불과했을 뿐이다. 따라서 진한제국이라는 개념틀을 가지고 당시의 중국사를 연구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진한제국이라는 개념틀을 사용하는 학자들도 전한 초기 황제들은 진시황과 같이 절대권력을 향유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예컨대 리카이위엔李開元은 유방의 등극은 그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부하들과 공유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러한 형세는 한문제때까지 지속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린지엔밍林劍鳴은 진시황이래로 황제들은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정치 체제를 이용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한문제때 지방제후들의 세력은 중앙정부와 항쟁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고 인정하였다. 


따라서 진나라가 멸망한 뒤 소위 황제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전제정치체제는 한무제 이후에야 비로소 다시 완정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무제때 어떻게 전제정치체제를 비교적 완정하게 복구했을까? 이에 나는 한문제시기 경제 정책의 성공이, 한경제가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하고, 한무제가 강대한 권력을 휘두르는 기틀이 되었다는 가설을 세웠고, 4년 동안의 연구를 통해 박사논문으로 완성했다. 


하지만 나의 연구는 한국과 중국의 일부 학자들에게 이단으로 몰려 학술지에 게재되는 것을 거부당하고, 박사 학위 논문 심사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황당한 건 바로 이것이다. 


"당신의 연구는 상식에 어긋난다."


그들이 말하는 상식에 따르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직후 황제 전제 체제가 완성되었으며, 비록 초한전쟁이라는 혼란기를 겪었지만, 유방이 한고조로 즉위한 뒤 바로 전 중국 인민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했다. 


하지만 본문에서 언급된 사례들은 이런 그들의 상식이 타당하지 못하다는 의심을 품게 만들기 충분하다. 뿐만 아니라 중국사 연구의 권위자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전목의 견해도 상식에 어긋나는가? 과연 그들의 학술적 권위가 전목 선생의 견해도 비상식적인 것이라고 치부할 정도로 대단한가? 자신들의 상식이 잘못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 쯤 해봐야 하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 


하지만 그들은 내 연구가 자신들의 상식과 배치된다고, 학술지 게재와 박사 논문 심사를 거부했다. 나한테 링에 오를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너무 순진했었다.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학계 주류 이론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파고들지 않고, 아부를 떨었어야 했다. 


소위 학계에 환멸을 느꼈다. 더이상 역사 연구를 업으로 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중국사 학계가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 먹고 살 길을 찾았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결심이었다.  


하지만 4년 동안 공을 들여 완성한 박사 논문이 빛을 보지 못한 채 땅 속에 묻힌다면 참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박사 논문을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게 번역하고, 아울러 박사 논문을 쓰면서 얻은 깨달음을 녹여서, 브런치에 연재할 생각이다. 운이 좋으면, 단행본으로 출판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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