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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Aug 02. 2018

진시황의 죽음에 관한 의문

진시황은 정말 부소를 태자로 책봉할 마음이 있었을까? 

조고와 이사가 진시황이 죽은 뒤 이를 은폐하고 조서를 꾸며 호해를 황제로 만든 일화는 너무 유명하다. 그런데 여사면 선생은 이 사건에 신빙성이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고 하였다. 





진시황이 순행 중 사구에서 죽자, 조고가 이사를 꼬셨다.


“장자 부소는 강인하고 용맹하며 무예에 조예가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신뢰하게 만들 줄 알며, 사기를 진작시키는 능력도 뛰어납니다. 그런데 그가 즉위하면 반드시 몽염을 승상으로 삼으실 테지만, 군후께서는 통후通侯의 인印을 끝내 품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실 것이 분명합니다.” (<사기-이사열전>)


이에 이사가 조고의 말을 듣고 함께 진시황의 붕어를 비밀에 부친 채 조서를 위조해서 동행하던 호해를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사신을 몽염의 동생 몽의에게 보냈다. 몽의는 사신을 맞이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이 설사 선왕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고는 하나 어렸을 때부터 벼슬길에 올라 돌아가셨을 때까지 계속 함께 했으니 그분의 의중은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설사 제가 호해 전하의 현명함을 잘 몰랐다고는 하나, 그 분께서만 홀로 선왕과 함께 천하를 돌아다니셨습니다. 이에 선왕과 다른 공자들의 관계가 분명히 소원하셨을 것임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마 선왕께서 호해 전하를 중용하신 까닭은 수 년 동안 업적을 쌓으셨기 때문일 겁니다. 이에 신이 감히 무슨 간언을 하고, 무슨 계책을 감히 세우겠습니까. 대부께서는 이점을 고려하셔서 신으로 하여금 진상이나마 밝히고 죽게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하지만 사자는 호해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몽의의 말을 듣지 않고 죽여버렸다.  (<사기-몽염열전>)


옛날에 태자는 모두 군사를 거느리지 않았다. 그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게 한다면 이는 폐위하겠다는 뜻을 품은 것이며, 바로 이렇게 진헌공晉獻公이 신생申生을 대했다. 


진헌공 12년, 헌공은 애첩인 여희에게서 아들 해제奚齊를 낳자, 태자를 폐위하려고 생각했다. 이에 태자 신생을 곡옥曲沃으로 보냈다. 진헌공 16년, 헌공은 상군上軍, 신생申生은 하군下軍을 거느리고, 경耿나라, 위魏나라 등을 멸망시켰다. 회군 뒤 진헌공은 태자 신생을 위해 곡옥에 성을 쌓고, 조숙趙夙에게 경 땅을, 필만畢萬에게 위 땅을 하사하고 대부大夫로 삼으려고 했다. 이에 사천士薦이 말했다. “태자를 한 나라의 군주[國君]로 세울 수 없다. 그에게 도성을 나누어 주고 경卿의 지위까지 준다고 하는데, 이미 그는 지극한 지위에 올랐는데, 어찌 또 한 나라의 군주로 세울 수 있겠는가.” (<사기-진세가晉世家>)




따라서 부소가 태자가 되지 못하고, 상군의 군대를 감독하는 일을 맡기로 결정했을 때, 20여 명의 아들 가운데 호해만이 홀로 진시황을 따라간 일을 가리켜, 몽의가 선왕께서 태자를 중용하셨다고 하면서 몇 년 동안의 업적을 쌓으셨었다고 한 말은 틀리지가 않았다. 사실 부소와 몽씨 일족은 깊은 교류을 맺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사가 진나라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공로를 오랫동안 쌓아왔는데, 어찌 부소가 반드시 이사를 폐하고 그 자리에 몽염을 임명할 것이라고 알 수 있겠는가. 만약에 몽염이 임명되면 자신을 통후의 인을 품은 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임을 어두운 곳에서 촛불로 비추듯 이사가 환히 꿰뚫어 보았다면, 거꾸로 어찌 조고에 의해 자신이 이용만 당하고 화를 입을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따라서 역사서에서 전하는 이사와 조고가 태자를 폐위하고 세운 사건은 반드시 모두 사실이 아닐 것이다.     

이 고증은 본인이 일본 학자보다 민국 시대 학자들의 연구를 더 높게 평가하는 예시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 학자들의 고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맑스주의 같은 근대에 만들어진 이론을 토대로 사료 고증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고증은 성리학자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토대로 경전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비판하고 사실을 재구축, 심지어 왜곡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청나라 고증학의 박실한 학풍을 이어받은 민국 시대 학자들은 고증의 근거로 오로지 사료만을 제시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 방법이 어떤 역사적 사실에 대해 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창의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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