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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Nov 10. 2020

절망의 죽음과 트럼프 현상

미국 대선 단상

한 50대의 남성이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며 응급실로 왔다. 코카인에 중독된 환자는, 응급실에 오기 직전, 과량의 코카인을 복용한 것으로 나타났고 (코카인은 심장에 무리를 주는 마약이다)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정신과 자문팀에 진료 의뢰된 그와의 첫 만남에서 과다 복용을 하게 된 경위에 대해 물었을 때, 환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그런 생각을 하긴 했었던 것 같아요, ‘아 가슴이 너무 아파서 죽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뭐 죽어도 큰 상관은 없지’하구요.


거구의 사내는 덤덤히 말했다. 그리고는 이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삶과 미래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했다. 내과적 치료를 마친 후, 그는 정신과 병동으로 전원 되었다.


2020년 미국 사회에서는 '절망의 죽음 (deaths of despair)'이라는 개념이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5년 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튼 박사와 앤 케이스 박사가 처음 제시한 '절망의 죽음'이란, 알코올 복용과 관련된 간 질환과 마약 등을 비롯한 약물 과다 복용, 그리고 자살로 인한 죽음들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수많은 사람들 (특히 백인 중장년층)이 절망의 죽음들로 인해 조기 사망함으로 인해, 의학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2014년부터 2017년에 이르기까지 3년 연속으로 기대수명이 줄어드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고 스페인 독감이 창궐했던 1915-1918년 이후 최초로 있는 일이었다.(1)    

절망의 죽음, 특히 약물과 관련된 죽음은 급증하고 있다 (출처: 미 상원 홈페이지)

마약 관련, 특히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인한 죽음은 특히 급증하고 있는 문제이다 (윗 그림). (2) 미국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1999년에서 2018년 사이에 4배나 증가하였다. 특히, 많은 과다 복용이 실수가 아닌 앞선 환자와 같이 자살 의도가 있는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정신과 의사들도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3)


정신과 레지던트로서 자살시도나 자살 생각으로 병원에 입원한 환자는 수도 없이 봐왔었고, 중독 정신과 펠로우로서 일하면서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병원에 오는 환자들을 보다 더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자살 시도/생각 또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입원한 환자는 각자 다양한 이유,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뿌리 깊은 절망감 (hopelessness) 이 그것이다.


레지던트 때 나의 첫 외래 환자는 한 중년의 백인 남성이었다. 맨하탄의 고급 콘도의 도어맨으로 일하던 그를 나는 거의 한주도 빠짐없이 일 년간 만났었다.


코카인 중독으로 자살 기도를 하며 벨뷰 병원의 응급실에 찾아왔었던 환자는, 중독 치료 프로그램에 진료 의뢰되었다. 일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야간 근무를 마친 후 늘 병원에 와서 오전 중독 그룹 치료에 참여했다. 그리고, 점차 그룹의 리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어느새 일 년이 지나, 그는 하루하루 정해진 일과에 맞춰 충실히 살아가는 모범시민이 되어있었다. 중독 치료와 함께 자신의 삶을 180도 바꿔놓은 그와의 동행은 나를 중독 정신의학으로 이끄는 큰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나의 첫 외래 환자는 맨하탄의 도어맨이었다 (출처: 뉴욕 타임스)

그렇게 벨뷰 병원의 중독 프로그램에서도 모범 환자로 칭송받던 그가 나에게 큰 충격을 준 날이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티브이 뉴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한 시간 내내 트럼프의 지지자들이나 할법한 거친 말들을 쏟아냈던 것이다. 백인, 저학력, 블루 칼라 노동자, 많은 게 트럼프 지지자의 특성과 일치했지만, 한 번도 정치색으로 환자를 바라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더 충격이었었다. 그날, 나는 차마 그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여러 차례 고개를 떨궜었다.


상담 시간이 끝나고 상담을 복기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 자신의 편견을 걷어내고, 환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니 많은 게 이해가 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백인으로서의 혜택 (white privilege)'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면 화가 난다고 했다. 그는 늘 흑인이 대다수였던 50-60년대의 브루클린에서 나고 자라서 학교에서 백인이라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곤 했었다고 말했었다. 자신은 자기가 단지 백인이라는 이유로 악마화 되고, 혜택을 받은 것처럼 취급당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분노의 방향이 이민자를 향한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었겠지만 (이 또한 그의 탓이라기보다는 정치인들의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의 분노 자체는 충분히 이해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뒤따르는 여러 세션에서 우리는 이에 대해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시 서로의 눈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가 마지막 날 그동안 고마웠다며 인사를 하고 돌아설 때, 나는 오랜 친구를 떠나보내는 것처럼 마음이 저렸다.


실제로, 앞서 말한 절망의 죽음은 저소득층, 고졸 이하 백인들을 가장 심하게 강타했다. 이 집단에서는 1999년에서 2013년까지, 알코올 과다 복용으로 인한 죽음은 네 배 증가하였고, 자살은 81% 증가하였다. 알코올 남용과 관련된 간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은 50% 증가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증가 추세는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반면에 대졸 이상 백인들의 사망률은 큰 변화가 없었다. (1)  

트럼프에 환호하는 지지자들 (출처: 뉴욕타임스)

그 날 이후로 트럼프 지지자들을 바라보는 내 시각도 조금은 달라졌다. 분열의 시대에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악마처럼 묘사되고, 트럼프와 같은 '백인 우월주의자', 혹은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순한 흑백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소수 인종이자 이민자인 나는 당연히 내 입장에서 트럼프의 인종차별적 언행, 반 이민적인 정책에 더더욱 주목해서 판단할 것이다. 하지만, 저소득층 백인의 입장에서, 인종 문제보다 더 급한 것은 자기 자신의 사회, 경제적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트럼프의 정책이 실제로 그들에게 사회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좌/우, 진보/보수를 불문하고 정치인들의 정책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실제로 측정하는 것은 그 분야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 단순히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을 찍는 것은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정치인들이 조장하는 분열의 정치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트럼프가 조장하는 분열 구도에 우리 자신도 동화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트럼프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고, 그의 팬덤 또한 신기루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 트럼프를 싫어하던 사람에게는 세상이 하루아침에 뒤바뀐 것 같겠지만, 여전히 절망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삶은 달라진 것이 없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트럼프가 그들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해서 졌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들을 어루만져주고, 그들의 삶을 나아지게 만드는 것이, 바이든 정권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다.


바이든은 그의 대선 승리를 수락하는 연설에서, 이제 서로를 악마화하고, 적으로 바라보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고 말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 분열된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트럼프 지지자들을 볼 때면, 나는 나의 첫 환자를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공명하던  기억을 되새긴다.   


참고문헌

(1) Anne Case, Angus Deaton. Rising midlife morbidity and mortality, US whites.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Dec 2015, 112 (49) 15078-15083; DOI: 10.1073/pnas.1518393112

(2) A project of the Joint Economic Committee – Republicans: Chairman, Sen. Mike Lee. Long-Term Trends in Deaths of Despair SCP REPORT NO. 4-19; SEPTEMBER 2019

(3) Oquendo MA, Volkow ND. Suicide: A Silent Contributor to Opioid-Overdose Deaths. N Engl J Med 2018; 378:1567-1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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