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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Mar 02. 2021

왜 지금? 그럼 언제?

남성들의 성폭력 트라우마에 대하여

 

그 날의 일들이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그 순간만큼은 지금도 생생해요. 마치 어제처럼요.


대학교 때 실연당하고 난 후, 친구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꺼이꺼이 우는 경우가 아닌 이상, 성인 남자가 눈앞에서 목놓아 우는 장면을 보는 일은 우리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하지만 코네티컷 보훈 병원에서 중독 정신과 펠로우 생활을 하던 지난 한 해동안, 나는 거구의 예비역 중년 남성들이 내 앞에서 흐느껴 우는 것을 지켜보는 경험을 많이 했다.   


남자들이 흐느껴 우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보는 건 흔한 일은 아니다 (출처: The New Yorker)

이들의 대부분은 군대에 있을 당시, 즉 성인이 되어서 겪었던 상사의 성폭력에 의한 트라우마였다. 어떤 이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악몽에 시달렸고, 어떤 이는 그 기억을 억누르고자 약물에 의존하였다가 약물 중독이 되기도 하였다. 자신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어릴 적 트라우마가 재 점화된 한 환자는, 본인의 아들 또한 유사한 트라우마를 경험할까 늘 노심초사하곤 했다. 


레지던트 당시, 맨하탄 보훈 병원 일반 정신과 클리닉에서 적지 않은 군대에서의 성 트라우마 (military sexual trauma) 환자 들을 봤었지만, 그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하지만 중독 정신과 펠로우를 하며 보다 밀접하게 환자들을 접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남성들 또한 적지 않은 수가 성폭력 관련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연구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미국 성인 남성 6 명 중 1 명은 성인이 되기 이전에 성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1,2) 그리고,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밝히기를 꺼리는 남성들의 특성상 (이러한 경향성은 익명 설문 조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실제 성폭력을 경험한 남성의 비율은 더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3) 그리고, 이는 군대나, 운동부와 같이 남성이 대다수인 집단에서 매우 흔하다.(4,5) 

 

운동부에서 남자아이에 대한 성폭력 또한 흔하다 (출처: Shutterstock)

이는 매우 조심스러운 부분이지만, 성폭력 가해자 중에 스스로 성폭력 피해자인 경우 또한 적지 않다.(6-8) 일례로, 한 연구 결과 성폭력 가해자 중 23퍼센트가 어렸을 때 성폭력을 당한 적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6) 조심스럽게 말하는 이유는,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이 그 사람이 가해자가 될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높이는 것은 아니며, 이런 연구 결과가 오히려 성폭력을 당한 사람들에게 또 다른 낙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6) 그리고, 마찬가지로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가해자를 옹호하고자 쓰는 내용 또한 아니다. 단지, 피해자가 성폭력 가해자였다고 해서, 그들이 당한 피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싶을 뿐이다. 부디 오해하지 않길 부탁드린다. 


남성들이 당한 성폭력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우리 사회는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가 이에 대해서 확실치 않다면, 성폭력 피해자인 남자아이를 여자 아이로 바꾸어 생각해보는 상상을 (상상하고 싶지 않겠지만) 해볼 수 있다. 아마 십중팔구, 본인이 느끼는 분노, 혐오 감정이 증폭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그리고, 나는 그만큼의 주목을 남성 피해자 또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원순 시장 때도 마찬가지고, 성폭력에 대한 폭로 기사가 나오면,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왜 하필이면 지금? 왜 이제 와서?


사실 이런 질문은 무의미하다. 이 전에도 썼던 적이 있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또렷하게 폭력을 당하던 순간의 중요한 기억들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그 순간이 지금, 혹은 방금 발생한 것처럼 말이다. 환자들은 트라우마의 기억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것이 어제였나, 수십 년 전이었나는 중요하지 않다. 


진료실에서 환자들은 자기 아내에게도 상세하게 말할 수 없었던 그날의 기억들을 정신과 의사들 앞에서 털어놓곤 한다. 때로는 내 앞에 펼쳐진 진실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서, 감당하기 힘들 때도 많다. 


수십 년이 지난 일의 진실은 단지, 당사자 들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내가 아는 것은 하나, 환자들이 일개 정신과 의사에게 트라우마를 털어놓는 것조차 태산과 같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부디 이 진실공방이, 무의미한 소모전이 아닌, 모든 피해자들을 치유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길, 그리고 우리 사회에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예방과 근절에 이바지하길 바랄 뿐이다. 


참고 문헌

(1) Dube, S. R., et al. (2005). Long-term consequences of childhood sexual abuse by gender of victimAmerican Journal of Preventive Medicine, 28, 430-438.

(2) Lisak, D., Hopper, J., & Song, P. (1996). Factors in the cycle of violence: Gender rigidity and emotional constrictionJournal of Traumatic Stress, 9, 721-743.

(3) Widom, C. S., & Morris, S. (1997). Accuracy of adult recollections of childhood victimization, Part 2: Childhood sexual abuse. Psychological Assessment, 9(1), 34–46

(4) Hartill, M. (2009). The sexual abuse in boys in organized male sports. Men and Masculinities, 12(2), 225-249.

(5) Parent, S., & Bannon, J. (2012). Sexual abuse in sport: What about boys? Child and Youth Services Review, 34(2), 354-359.  

(6) Hanson, R.K., & Slarter, S. (1988). Sexual victimization in the history of child sexual abusers: A review. Annals of Sex Research, 1, 485-499.

(7) Garland, R.J., & Dougher, M.J. (1990). The abused/abuser hypothesis of child sexual abuse: A critical review of theory and research. In J.R. Feierman, ed., Pedophilia: Biosocial dimensions (pp. 488-519). New York: Springer-Verlag.

(8) Glasser, M., Kolvin, I., Campbell, D., Glasser, A., Leitch, I., & Farrelly, S. (2001) Cycle of child sexual abuse: links between being a victim and becoming a perpetrator. British Journal of Psychiatry, 179, 482-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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