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 사랑과 기표 - (2)
오랫동안 나는 프로이트가 진전시켰던 '혁명'에 의문을 제기해 왔습니다. 히스테리 담화는 그에게 기표가 존재한다는, 다른 본질을 일깨워줬습니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담화에서 이 기표의 효과를 숙고하여 이 도식을 사분의 일씩 회전시켜 분석담화로 만드는 방법을 깨우쳤습니다.(역자 주 : 세미나 17 네 가지 담화의 도식 참고.)
사분의 일 회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혁명을 연상시키지만, 혁명이 서브버전(subversion, 전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회전하는 것 - 이것을 우리가 혁명이라 부르는 것은 - 그 자체의 진술로서 되돌아옴을 암시합니다.
분명 우리는 이 되돌아옴의 완성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사분의 일 회전이 매우 고통스럽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혁명이 어디에나 존재했다면 그것은 결코 코페르니쿠스적 수준은 아닙니다. (코페르니쿠스 시대 이전부터) 오랫동안 태양이 지구가 도는 중심일 수 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수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회전의 출발점입니다. 별들이 도는 것은 지구가 자체적으로 회전하기 때문입니다 이 회전, 이 혁명, 이 행성들의 영원한 회전에서 다른 구체들을 만들고, 소위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구상하며, 행성들이 진동운동처럼 지구에 대해 왔다 갔다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행성들의 움직임을 고민한 것은 대단한 업적이 아니겠습니까? 코페르니쿠스는 중간 행성들의 움직임이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는 점을 추가했을 뿐입니다. 지구가 중심에 있든 말든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결코 혁명이 아닙니다. 행성의 중심이 가정된다면, 그것은 순전히 은유적인 담화에서 지배적인 중심을 구성하는데, 지구나 태양이 그 지배적인 중심을 차지하게 하는 것 자체가 기표의 중심이 그 자체를 유지하는 것을 전복시키지 진 않습니다. 인간 - 이 용어가 지정하는 것, 그것은 의미를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은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는 발견에 의해 전혀 흔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태양의 자리를 대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이제 태양도 중심이 아니며, 점점 더 불안정한 상태를 가진 우주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중심에 남아 있는 것은 기의가 결국 항상 같은 의미를 유지한다는, 그런 좋은 일상입니다. 이 의미는 각자가 자신의 세계, 즉 자신의 가족과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일부라는 느낌에 의해 주어집니다. 여러분 각자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것에 매달려 있으며, 여러분이 잘 알아차릴 수 있다면 다행일 정도입니다. 여러분의 편견들이 여러분의 반란의 범위를 제한하며, 매우 정확하게 여러분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 한계에서, 특히 세계관이라고 불리는 무엇이 여전히 완벽하게 구형인 한에서 입니다. 기의는 여러분이 그것을 옮기는 어느 곳에서나 그 중심을 찾습니다.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기까지 분석담화는 그 비중심성을 유지하기 너무나 어렵고, 아직 공동의식(역자 주 : 수학자 데이비드 루이스가 1969년 소개한 개념으로, 모두가 그것을 공유한다는 것을 알고, 모두가 그것을 공유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 지식을 말한다. 집합론과 경제학, 게임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는 개념)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전복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에 관한 언급을 계속할 수 있다면, 저는 그것이 가진 실제적인 사실을 강조할 겁니다. 중심을 바꾸자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계속 회전합니다. 그 사실은 우리에게 여전히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결국에는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만으로 동기 부여되며, 천체가 회전한다는 사실로만 축소한다면 그렇습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돌고 있으며, 예를 들어 여러분이 나이를 연도로 계산하는 것과 같은 온갖 효과를 낳습니다. 만약 어디에서나 혁명이 있었다면, 그것은 도는 것의 회전중심을 변경한 것이 아니라, 회전을 '넘어짐(tomber)'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몇몇 청중분들이 깨달으셨을 수도 있는데, 가장 중요한 지점은 코페르니쿠스가 아니라, 그보다는 케플러에 가깝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돌지 않기 때문이죠. 타원을 궤도로 돌며, 이미 중심의 기능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케플러에게서 '넘어지는 것'은 타원의 한 점으로서 초점에 있으며, 대칭적인 점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는 분명 중심에 대한 편견을 깹니다. 하지만 넘어짐은 무엇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 무게를 갖는 걸까요? 이는 다음과 같은 수식에 불과합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작품으로 부당하게 여겨지는, 이 요약된 이 작은 다섯 글자와 하나의 숫자. 이것이 우리를 혁명적이면서도 실제로는 상상된 기능에서 끌어내는 것입니다. 이는 실재에 근거한 혁명의 상상적 기능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분석담화가 새로운 담화가 등장하면서 무언가가 생산되는데, 시작이 기표의 기능으로부터 취해지며, 경험적 사실로서 기표가 기의 효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이 인정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의 효과로부터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렸던 구조화가 발생합니다. 오랫동안 세계가 형성되는 것은 자연스럽게 보였으며, 그 상관관계는 영원한 존재, 즉 영원으로 간주되는 존재였습니다. 전체로서 구상된 이 세계는, 이 단어가 제한적인 것을 암시하는 한에서, 그리고 그것이 제공하는 어떤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개념입니다—그것은 바로 단어입니다—시각, 시선, 상상의 포착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상한 결과가 남는데, 즉 누군가, 이 세계의 일부인 누군가가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 일자는 존재의 상태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그것이 인식의 지지가 될 수 없다면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그렇게 표시되는 교착 상태, 이 우주론은 세계의 승인에서 비롯됩니다. 반대로, 분석담화에는 우리를 이끌어줄 것이 있지 않습니까? 세계 자체로서의 모든 지속성, 모든 지속은 포기되어야 합니다.
언어—철학적 담화에서 만들어진 라렁그(la langue)—는 매 순간, 보시다시피, 저는 그 세계, 그것의 가정된 실체로 미끄러지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실체는 존재의 기능으로 스며들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