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 사랑과 기표 - (3)
분석담화의 흐름을 따르는 것은 적어도 재파열을 일으키고, 굴곡을 만들고, 그 자체로만 유지될 수 없는 힘의 선들의 곡률을 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그 자체로 단절과 불연속성을 만들어냅니다. 우리의 구원은 언어 안에서 그것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학이 글자를 사용하는 방식만큼 분석담화의 지평을 잘 구성하는 것은 없어 보입니다. 문자(lettre)는 담화에서 우연히도, 필연적으로도, 문법이라고 불리는 것을 드러냅니다. 문법은 오직 글로서만 언어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언어를 넘어서, 오직 글쓰기에만 의존하는 이 효과는 분명히 수학의 이상입니다. 그러나 글쓰기를 거부하는 것은 언어의 모든 효과 중에서 표현될 수 있는 것을 금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표현은 언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가정되기 이전과 이후로 이어집니다.
이전을 가정하는 것—우리는 그것이 단지 직관적인 지시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이 가정은 언어가 그 기의 효과에 있어 지시 대상의 옆에 있기 때문에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어가 우리에게 존재를 강요하고, 우리로 하여금 존재에 대해 우리가 결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하는 것이 사실이 아닐까요?
우리가 깨뜨려야 할 것은, 이 '곁 존재(le par-être, l'être para, l'être àcôté)' (역자 주 : 라깡은 le par-être라는 표현을 이후 자주 사용하지만, 이 문단에서는 세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애매한 번역을 피하기 위해 l'être àcôté 와 같은 의미로, 즉 곁에 있는 존재라는 번역을 축약해 '곁 존재'로 번역하였다. par-être를 직역하면 '존재에 의한'이 되므로, 이하 문단에서 언급된 '물자체로부터 현시'라는 개념과 혼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로부터 달아나는 존재를 대체하는 것입니다.
저는 과거에 항상 말해왔듯이 곁 존재(le par-être)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현시(paraître)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현시는 그 너머에 실체, 물자체(noumêne)가 있다는 건데, 이는 실제로 어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를 이끌어냈습니다. 존재가 곁존재로부터 현시되는 지점, 즉 글쓰기의 효과로부터 역설이 발생합니다. 다시 말해 '나는 곁존재한다', '너는 곁존재한다', '그는 곁존재한다', '우리는 곁존재한다' 등으로 변형되어야 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곁존재와 관련하여 성관계가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완해야 합니다. 언어가 접근하는 모든 것에서 부족함만을 드러냅니다.
성관계를 대체하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대타자, 진리의 장소로서의 대타자는 비록 축소될 수는 없지만 신성한 존재, 즉 신이라는 용어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신은, 말장난을 조금 하자면, 신이 '신말'(역자 주 : 신(神)과 말의 합성어. 프랑스어로 신은 dieu, 라깡은 이를 동사화하여 dieur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dire(말하다)라는 동사와 발음이 비슷하다. 대타자의 지위를 신에 비유하는 대목이다.)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사소한 것만으로도 말하기는 신을 만듭니다. 그리고 무언가가 말해지는 한, 신의 가설은 여전히 존재할 것입니다.
이는 결국 신학자들, 신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무신론자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두려움을 핑계로 존재가 자신의 팔에 머리를 감추려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마치 신이 실제로 어떤 존재를 나타낸 적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반면, 대타자의 형태로 존재하게 만들지 않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싫어하는 역사에서 매우 명백히 드러나죠.
역사는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타자의 말을 대면하는 것이며, 타자는 그 자신의 어리석음, 부끄러움, 장애물, 당혹감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내야 합니까?—그것은 다름 아닌 이 말들의 효과입니다. 이 효과는 우리가 어떻게 흔들리고, 움직이고, 괴로워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가로 이어지려면 유용해야 하고 그들이 준비하고 적응하고 절뚝거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인생을 겁니다.
이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 감정을 통해 결국—교회의 보호 아래 사랑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본 것처럼—신체의 재생산에 이르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언어가 사람들을 몸과 몸, 육화 된 몸으로 계속해서 번식하게 만드는 것 외에 다른 효과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언어의 다른 효과는 바로 글쓰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