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소장 전상원 교수를 만나다
퇴사를 노래 불렀던 때가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퇴사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 친구들은 내가 이렇게 이 회사를 오래 다닐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그 순간을 분명히 기억한다. 여느 때와 같이 답답한 스튜디오 안에서 정말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며, 마음 깊은 곳에서 '청춘의 정력이 아깝다'는 한탄이 올라오던 순간을. 아마 나는 번아웃이 왔었던 것 같다.
비단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에서 19만 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스트레스 설문조사를 한 결과, 놀랍게도 88.6%가 번아웃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번아웃이 오는 이유는 2가지로 요약된다. 과도한 업무와 직장 내 대인관계. 나로서는 예측할 수 없는 야근과 주말 근무, '도대체 이런 일을 왜?'로 시작하는 자잘한 업무의 증식과 팀원의 절반을 내보낸 팀장이 그 원인이었겠다.
번아웃이 오면 업무 집중력이 떨어지고 퇴사 욕구가 상승한다. 전상원 교수는 번아웃 상태를 한 단어로 정의했다. 좀비 상태. 즉, 뭔가를 하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하고 있는 상태다. 이 일을 왜 하는지, 어떤 이득이 있는지, 나의 커리어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다. 힘들어도 일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했고, 체계적이지 못한 업무를 더 잘 해내보고자 고민했고 동료들과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번아웃이 왔다.
정신건강의학과의 번아웃 진단 기준은 위와 같다. 일을 하면 할수록 이 일을 오래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어떻게든 해내더라도, 10년 뒤 20년 뒤까지 내가 이 일을 즐겁게 할 수 있을까?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이런 고됨을 더 나이 든 육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이 일에서 마음이 떠날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면서 여기저기 잔병치레가 시작된다. 구내염이 자주 생기고, 잠을 잘 못 자며, 자주 배가 아프다. 일 때문에 몸이 아프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렇게 퇴사하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와 못 견딜 지경까지 갔다.
Q. 번아웃이 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해요?
전상원(이하 전): 먼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쉬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울증과 번아웃이 다른 게, 증상은 비슷해 보여도 번아웃은 '일'이라는 명확한 원인이 있어요. 그래서 번아웃이 오면, 그 일을 끊어내야 합니다. 물론 어렵죠. 대부분 사정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고요.
그런데 핸드폰 배터리가 0%면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요. 번아웃이 배터리가 0%인 상황입니다. 일단 쉬면서 충전을 시켜 50%로 만들어라도 놔야, 뭐라도 하면서 회복할 수 있어요. 배터리 0%인 상태로 그대로 놔두면 정신과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공황장애, 우울증, 화병... 그럼 그때부터는 환자가 되는 거잖아요.
Q. 일을 끊어낼 수가 없다면요?
전: 일을 끊어낼 수 없다면 차선책으로! 퇴근하고 나서 시간을 활용해야 합니다. 회사에서는 내가 소진되더라도 퇴근하고 만큼은 '재밌다!', '이거 하고 싶어서 집에 가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드는 취미 활동을 가져야 해요. 퇴근하고 나서 진짜 그거 하나만은 하고 싶은 게 있어야 해요.
제게 오면 맨날 죽겠다고 하시던 한 펀드매니저 분이 있어요. 그분은 퇴근하고 인형 뽑기를 한데요. 일주일에 1-2번 동네를 다 돌아다니면서 3-40만 원어치 인형을 뽑는데요. 인형을 잘 뽑고 싶어서 유튜브를 보면서 잘 뽑는 방법을 연구하고, 손기술을 연습한답니다. 그분은 스스로 번아웃이 왔다고 이야기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니었어요.
또 어떤 분은 퇴근하고 자전거를 탑니다. 그냥 타는 게 아니라 아주 프로페셔널하게 타세요. 옷도 갖춰 입고, 자전거도 아주 좋은 자전거를 탑니다. 타면서 회사 욕, 상사 욕을 하신데요. "너네들이 아무리 뒤에서 나를 잡아끌어도, 내 바퀴는 앞으로 달린다!!" 하면서 1-2시간 달리신답니다. 평일에는 그렇게 홍제천에서 이촌동까지 달리고, 주말에는 반포대교까지 왕복 3-40km를 그렇게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평안해진데요. 회사 생각도 싹 사라지고요.
Q. 퇴근하고 유튜브랑 넷플릭스는 많이 보는 것 같아요.
전: 집에서 유튜브 보고 넷플릭스 보는 건 취미 활동이 아닙니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웃고 떠들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거지 그게 취미가 되려면 6시 퇴근할 때 그게 하고 싶어야 돼요. '아 유튜브 보고 싶다! 유튜브 보려고 빨리 퇴근해야겠다!' 그런 마음이 들어야 유튜브를 취미 활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OTT 플랫폼을 그냥 둘러보다 괜찮겠네 싶어서 보는 게 아니라, '평론들 보니까 이 영화 보고 싶은데? 이번에는 이 영화 보고 평론해 봐야겠다.' 그런 생각이 드셔야 합니다.
Q. 교수님도 퇴근길이 설레어지는 취미 활동이 있으세요?
전: 아, 예리한 질문입니다. 저는... 철학책 읽기인 것 같아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어! 사상이 이상해! 그런데 쭉 읽다 보면 기가차는 생각들이 숨어 있더라고요. 신도 있는 것 같은데, 신 밑에 정점을 이룬 사람들이 있는 느낌? 사람이 저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구나. 읽다 보면 신기해요. 4-5시간이 훌쩍 지나고 잠드는 시간이 미뤄질 때도 있어요. '평일엔 바쁘니까 주말에 책 읽어야지'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까, 철학책 읽는 게 제 취미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혹시 평일에도 읽을 짬이 있을까 가방에 항상 책 한 권을 들고 다닙니다. 그런데 책 읽기는 정적인 활동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운동부족을 피할 수 없네요...(하하)
Q. 번아웃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도 있을까요?
전: 취미 활동이 있다면, 그다음은 환기입니다. 쉽게 말하면 <끊임없는 수다>가 필요해요. 즐거운 술자리가 많으신 분들 있잖아요. 그런 분들을 보면 희한하게 번아웃이 잘 안 와요. 술자리에서 회사 욕도 실컷 하고, 상사 나쁜 놈이라고 함께 뒷담도 까고. 그러면 그 불편했던 감정들이 날아갑니다. '도대체 회사 다니기도 힘든데 사람을 언제 만나?' 하시는 분들 있죠? 그럴수록 노력해야 합니다. 직장 동료도 좋고, 가족도 좋고, 친구도 좋고, 강아지도 좋고. 부정적인 감정을 날려 보낼 수 있게 마음이 풀릴 때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다만 정말 퇴사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지혜는 경험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전상원 교수는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에서 진행한 40년 차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그 답을 찾았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 몸이 건강해야 하고, 함께 할 가족이 있어야 한다. 경제적인 안정이나 개인적 성취는 행복의 조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다만 불행에 있어서는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불행에는 돈이 개입한다. 건강을 잃었거나 돈이 없다면 불행하다고 여겨진다. 흔히 말하듯, 불행을 피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돈은 있어야 하지만 행복하기 위해선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일상의 지혜를 확인한 연구 결과가 아닌가 싶다.
어쨌든 연구가 보여주는 결과는 명확하다. 직장인으로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게 건강과 가족이라는 것. 그러니 퇴사를 고민할 때, 금전적인 문제 외에도 가족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건강을 잃고 있지 않는지도 꼭 살펴보고 결정을 하는 게 좋겠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 포기하기 어렵다면, 그래서 버티고 있는 사람이라면 정신과의 도움을 받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다만 너무나도 일을 열심히 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생으로 초대받은 귀한 손님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 철학자 김진영 씨가 암 투병으로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처럼, 아무래도 삶은 향연이니까. 우린 초대받은 손님이니까.
삶은 향연이다. 너는 초대받은 손님이다. 귀한 손님답게 우아하게 살아가라.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