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누구에게나 있었던 영원하지 않았던 사랑의 기억, 그 의미
- 500일의 썸머 (500)Days of summer, 2009
이 남자, 뉴 저지주 출신인 톰 핸슨은 자신이 ‘특별한 누군가’를 만나기 전까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고 믿으며 자랐다. 이런 믿음은 슬픈 영국 팝을 일찍 접한 것과 영화 “졸업”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여자, 미시건 주 출신인 썸머 핀은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부모님의 결혼이 파탄으로 끝난 후 그녀는 오직 두 가지만을 사랑했다. 첫 번째는 그녀의 검고 긴 머리카락, 둘째는 그것을 아무 고통 없이 잘라낼 수 있다는 점이다.
톰은 썸머를 1월 8일에 만난다.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그녀가 자신이 찾던 사람임을 알아차린다.
- 영화 500일의 썸머, 프롤로그
끝나버린 연애의 기억은 언제나 마음이 아픕니다. 봄날과 같은 첫 만남의 순간도, 서로 함께 사랑을 키워가던 눈부신 여름과 같은 나날들도 순간처럼 사라져 버리고 겨울의 황량함과 쓸쓸함만이 남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기억에는 기쁨과 슬픔과 같은 강렬하고 단순한 감정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떠나간 연인에 대한 원망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의구심과, 어른스럽지 못했던 자신의 미성숙에 대한 부끄러움이 한데 뒤섞여, 우리는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며, 궁금해하며, 아주 가끔은 술기운을 빌어 다음날 후회할 것이 분명한 문자나 통화를 하기도 합니다.
영화 500일의 썸머는 누구나 한 번 정도는 겪었을 법한 실패한 사랑에 대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시점 면에서 매우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로맨스 영화는 전지적 시점으로 시작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영화는 관객에게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서로가 없는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들이 서로에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보를 전달해가며 이야기를 진행해 나갑니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남녀 주인공의 순간순간의 감정선과 전체적인 서사를 극적이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게 됩니다.
반면, 영화 ‘500일의 썸머’는 철저히 남자 주인공인 톰의 시점으로만 진행됩니다. 주인공 톰과 영화를 보는 관객인 우리는 둘 다 썸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저렇게 반응하고 변해가는지에 대하여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톰처럼 답답해하고, 화를 내고, 겁을 먹게 됩니다. 인간관계에서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의 반응만큼이나 우리를 겁을 먹게 하고 화가 나게 하는 건 별로 없으니까요.
‘500일의 썸머’는 서사의 전개 면에서도 매우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첫 장면에서 488일째 두 사람이 벤치에서 손을 포개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다가 1일째로 돌아가 두 사람의 첫 만남의 순간을 보여주는 듯하더니 290일째 실연으로 힘들어하는 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시간을 뛰어넘는 전개는 이 영화가 ‘기억’에 대한 영화임을 시사합니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연속적으로 흘러가지만 기억은 언제나 불연속적이며 감정으로 덧칠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의 구성은 감정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강렬한 감정이 동반된 순간은 매우 쉽게 기억이 되고, 현재 느끼고 있는 강렬한 감정이 특정 기억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이를 감정적 기억(emotional memory)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랑의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는 톰의 정신세계 안에서 썸머는 자신을 버리고 간 악마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천사가 되기도 합니다.
(154일째)
“썸머를 사랑해. 그녀의 미소를 사랑해. 그녀의 머리칼이나 그녀의 무릎도 사랑해. 목에 있는 하트 모양 점도 좋아하고. 가끔 말하기 전에 입술을 핥는 것도 사랑스러워. 그녀의 웃음소리도 좋고 그녀의 자는 모습도 좋아.”
(322일째)
“나는 썸머가 싫어. 그녀의 삐뚤삐뚤한 치아도 싫고 60년대 헤어스타일도 싫고 울퉁불퉁한 무릎도 싫어. 목에 있는 바퀴벌레 모양 얼룩도 싫어. 말하기 전에 혀를 차는 것도 싫어.”
영화 제목은 500일의 썸머인데, 둘의 사랑은 290일째에 끝나버렸습니다. 영화 속 500일이라는 기간은 두 사람이 함께한 기간이 아니고 톰의 마음속을 썸머가 차지했던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썸머는 1일째에 톰의 마음으로 들어와 31일째 그의 마음을 빼앗았으며, 290일째 이별을 고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찢어놓았다가 500일째 그의 마음속에서 사라집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그의 마음을 차지했던 썸머는 어떤 여자였을까요?
영화에서 그녀의 행동은 모순 투성이었고 이는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주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면서도 먼저 톰에게 키스를 하였으며, 톰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으면서도 둘의 관계를 연인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직장동료의 결혼식장에서 다시 만난 그녀는 스스럼없이 톰에게 몸을 기대고 춤을 추며 그를 파티에 초대하나, 그 파티에서 보게 된 썸머의 약지에는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톰과의 만남을 통해 사랑을 믿게 된 그녀가 다른 사람과의 사랑을 시작하여 그 사랑을 완성한 아이러니는 톰과 관객의 마음을 아플 정도로 후벼 팝니다.
톰의 태도에도 모순은 존재합니다. 운명적인 사랑을 갈구하던 그였으나 톰은 언제나 사랑에 수동적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말을 건 것도, 연인으로서의 둘의 관계를 시작한 것도, 싸우고 나서 다시 손을 내민 것도 언제나 그가 아닌 썸머였습니다.
썸머에게 둘 사이의 관계를 끈질기게 규정짓기를 강요하던 톰은, 정작 자신이 그 관계를 규정할 생각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신과의 관계를 진전시키지 않는 썸머를 원망하면서도 그녀의 모순적인 태도 뒤에 숨겨져 있는 아픔과 불안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썸머가 자기 자신을 투영하던 그룹 비틀즈의 가장 인기 없는 멤버인 ‘링고스타’를 비웃고,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경솔한 행동을 마치 두 사람을 위한 행동인 것처럼 포장했던 톰을 그녀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립니다. 그녀가 떠나간 후에도 톰은 썸머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버림받은 자신만을 동정하며 몸부림칩니다.
결국 톰이 사랑을 하면서 떠올렸던 축하 문구는 공허하게 허공으로 흩어지고, 실제가 아닌 스케치로만 존재했던 톰의 건물들은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립니다.
독일계 미국인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버림받은 감정, 학대의 감정, 죽음에 대한 불안 등과 같은 실존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자신의 개체를 초월해서 타인과 결합하는가가 모든 시대 모든 인간의 삶의 화두라고 저술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한 개인이 세계 전체와 어떻게 관계할지를 결정하는 태도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결국 둘의 연애를 통해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였습니다. 운명을 믿지 않았던 여자는 운명을 믿게 되었고, 운명을 믿었던 남자는 운명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랑의 실패가 두 사람에게 남긴 것은 바로 세상을 대하는 가치관의 변화였던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려다가 결국 자신이 변화하게 되는 이러한 과정을 우리는 ‘성장’이라고 말합니다.
썸머를 잃고 폐인처럼 살던 톰은 어느 날 다시 일어나 건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톰이 새롭게 그린 건물들은 예전에 썸머에게 그려줬던 동화 같은 건물 그림과는 다르게 정교하고 현실감(원근감)이 넘칩니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은 실패하고 거부당했을 때 진정한 가치가 확인된다’라고 말하였던 것처럼 이제 그는 사랑을 하는 데 있어서 자신이 남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았던 저 작은 건물들은 실제로 작은 게 아니라 단지 자신이 멀리 있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같은 시간, 썸머는 사랑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떨쳐내고 웨딩드레스를 입으며 자신의 사랑을 완성시킬 준비에 나섭니다.
어느 날, 우연히 다시 만난 썸머와 톰은 서로에게 이야기합니다.
‘ 사실은 당신이 옳았어요. 틀렸던 것은 나였고요. ’
새롭게 취업을 하러 간 회사에서 면접을 기다리는 동안 톰은 한 여자를 만나 끌리게 됩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에게 다가갑니다. 그렇게 새로운 계절의 1일이 시작됩니다.
1년 중 대부분의 날들은 평범하다. 하루가 시작되고, 하루가 끝나고.
그 사이에 남겨지는 추억도 없이 대부분의 날들은 인생에서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5월 23일은 수요일이었다.
우연, 항상 일어나는 그것이다. 우연 그 이상 아무 의미도 없는.
톰은 마침내 기적이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명 같은 것은 없다.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그는 알았다. 그는 지금 그것을 확신했다.
- 영화 500일의 썸머,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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