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묵은 분노를 털어내는 방법
[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낡은 분노” 는 아닐까?
서두부터 왠지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낡은’이라는 형용사와 ‘분노’라는 명사는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낡은 분노”를 바꾸어 말하면, “해묵은 분노”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이제 조금 감이 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은 너무 많다.
친구가 나에게 던진 ‘왠지 나를 배려하지 않는 듯한‘ 사소한 말 한마디, 운전 도중 ‘일부러 나를 방해하려는 듯이’ 느릿느릿하게 운전하는 내 앞의 저 차량, 한창 바쁜 업무를 보는 중 상사가 와서 슬쩍 일을 얹어줄 때… 부당한 상황, 내가 무시당하는 듯한 상황이 되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분노의 감정을 느낀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되짚어 생각해 봐도 작은 사건들, 사소한 말 한마디에 너무 격렬한 반응이 나타날 때가 있다.
우리 마음에 감정의 폭풍이 들이닥칠 때, 잘 넘어가면 다행이지만 대개는 결과적으로 날카로운 말이나, 폭력적인 행동을 낳게 되고 마음의 상처들을 남기게 되는 경우가 많다.
분노의 폭풍우가 지나고 나면 다시 복구되기 힘들 정도로 폐허가 된 마음의 잔해만 남게 되는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나를 깊은 곳의 취약한 부분을 자극한 ‘그 무엇’이 있다.
알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내 감정의 폭발 버튼을 눌러버렸고, 그래서 평소의 나와는 다른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엇’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진_플리커스키마 화학 작용 schema chemistry
아래의 도표를 참조하도록 하자. 인지행동치료(Cognitive Behavioral Therapy)에서 마음을 들여다보는 틀로 사용하는 인지모델(Cognitive model)이다.
도표_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화가 나는 상황과 마주하게 될 때, 대개 ‘무시당하는 것 같고, 부당한 일이기 때문에’ 분노의 감정반응이 나타나게 된다.
언성을 높이는 등의 행동적 반응과, 온몸이 경직되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신체 반응이 이어 따라온다.
이런 과정은 자동적으로 일어나게 되는데, 그 순간에 떠오른 자동적 사고는 상황을 마주하는 개인마다 차이가 존재한다.
이는 그 순간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나와, 세상과,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 인지치료의 창시자 A.T. Beck 은 그것을 스키마(schema, 혹은 심리도식)라고 지칭했다.
이 순간의 반응은 마치 화학 작용이 일어나듯이 순식간에 일어난다.
순차적으로 천천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마주한 상황이 스키마로부터 의식으로 올라온 생각과 연결되어 미처 손 쓸 새도 없이 분노의 감정 반응으로 내달리게 된다.
이러한 반응을, 스키마 치료 이론에서는 스키마 화학 작용(schema chemistry)이라고 부른다.
분노의 게이지가 한 칸씩, 한 칸씩 서서히 올라가기보다는, 0퍼센트에서 100퍼센트로 갑자기 수직상승하는 경험은, 유쾌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겪어 보았을 것이다.
낡은 분노를 설명하는 열쇠는 스키마에 있다.
누구나 타고난 유전적 기질과 성장 과정의 경험을 통해 고유의 독특한 관점, 즉 스키마를 지니게 된다.
다른 관점을 지닌 이들은, 즐거운 일과 슬픈 일, 그리고 화가 나는 일에 대한 관점도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상처를 쉽게 받는 취약한 부분도 달라진다.
유독 상대방이 멀어지는 느낌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
조금만 연락이 되지 않아도 불안해 하고, 전화를 연거푸 걸어 보고, ‘나를 떠나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연결이 되면, 상대방에게 분노를 퍼붓곤 한다.
‘버림받음’의 스키마를 가지고 있는 경우이다.
또는 상대방의 언행을 모두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도 있다.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악하고, 자신을 착취하려 한다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상대방의 말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고 경계하게 된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처럼 폭발적인 분노가 나타난다.
이런 사람들은 ‘불신/학대’의 스키마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
‘결함’의 스키마를 가지고 있다면, 언제나 낮은 자존감에 시달린다.
자신에게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무의식중에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나에게 하는 말이 왠지 기분 나쁘게 느껴지고, 무시당하는 듯한 느낌을 쉽게 받는다.
늘 예민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사소한 말에 ‘울고 싶은데 뺨을 맞은 느낌’이 들고, 이런 분노의 감정을 상대방 탓(투사: projection)으로 돌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외에도 스키마 치료 이론(schema therapy theory)에서 이야기 하는 여러가지 스키마가 존재하지만, 나중에 다른 글로 다시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다.
스키마는 타고난 기질(temperament)과 성장 과정에서의 경험들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생겨난다.
그러므로, ‘낡은 분노’는 과거에 해결되지 않은 분노가, 현재의 작은 불씨를 만나는 순간 예전의 고통스러웠던 경험과 결합하여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상황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격렬한 분노가 나타나게 된다.
사진_플리커“낡은 분노”를 어떻게 털어낼 것인가
“낡은 분노”가 자신을 괴롭힌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성장 과정을 돌아보며, 충분한 이해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해묵은 감정들이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린 시절 겪었던 트라우마가 은연중에 자신의 생각, 감정,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스스로를 돌아보려는 인식이 오래된 먼지를 털어내는 첫 발걸음이 될 수 있다.
또한, 자신이 분노를 터뜨리는 그 순간은, 흡사 충분히 충족되지 않은 욕구에 분노 발작(temper tantrum)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
그때 만큼은 선반 위에 있는 장난감을 갖고 싶은 마음에, 바닥에 주저앉아 울며 떼쓰는 아이의 모습이다.
하지만, 내 분노의 감정을, 내 마음속에 여리고 상처받은, 충족되지 않은 욕구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가진 어린아이의 감정으로 이해하고, 조금은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러고 나면 자기 자신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는 과정이 수반된다.
자신의 스키마가 활성화된 순간을 인식(awareness)하는 것은 한 두 번의 경험으로는 불가능하다.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는 순간을 기록하는 감정 일기(emotion diary)를 쓰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어떤 형식이든 좋지만, 찰나의 순간에 활성화 된 스키마를 인식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혼자 힘으로 어렵다면, 전문가나 주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내 안의 해묵은 분노가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직전, 자신의 현 상태를 거리를 두고 보는 것(distancing), 상황과 분노의 사이에 약간의 여유를 두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의 건강한 부분이 마음속의 취약하고 어린아이를 충분히 위로해 주는 것, 이런 상황의 반복으로 건강한 패턴을 훈습(working through)하는 것이, 내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진 분노의 먼지를 털어내는 과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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