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일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섹스란 무엇인지에 대해 원론적이고 철학적인 고찰을 하는 것 자체가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섹스는 그저 섹스일 뿐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서로의 은밀한 성기를 노출하고 결합하는 일. 그 이상의 의미를 논하는 것이 이 시대에서는 무의미해 보일 지경이다.
섹스라는 행위가 주는 느낌과 거기에 수반한 감정들은-적어도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겐-매우 자극적이다. 포르노 한편을 보고 만족하는 voyeurism은 그 먼 옛날에 어쩔 수 없이 택했던 유일한 성적 대리만족 행위에 불과하다. 이제는 자극적인 섹스를 실제로 제공하는 ‘어둠의 경로’들이 우리 사회의 곳곳에 만연해 있다. 오피스텔은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의 축소판으로 왕성히 기능하는 중이다. ‘안마’라는 단어를 일상 대화 속에서 입 밖으로 내기에 매우 껄끄러운 시대가 되었다. 섹스는 더욱 농밀하고 은밀함을 더하고 거기에 음란함이라는 지위까지 갖추게 되었다. 미혼이건 기혼이건 성행위를 할 수 있는 남자들 모두의 전유물 같이 섹스는 그렇게 ‘어두워져’ 가는 중이다.
섹스에 대한 좀더 건강한 사념이란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Erikson은 섹스에 대해, 사랑하고 믿는, 일과 성, 그리고 여가의 주기를 조절하는 데 협력하는 이성 파트너와 자기상실의 공포 없이 성기결합을 통해 상호 절정감을 공유하여, 자식을 낳고 협력하여 키워 만족스러운 성장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정의했다고 한다. 그의 정의에 따르자면, 섹스의 필요조건은 신뢰하는 파트너, 충분조건은 자녀의 출산과 성장이다. 매우 자연스럽지만 한편으로 매우 일상적인 그래서 안타깝게도 진부한 표현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좀 특별한 구석도 있다. ‘자기상실의 공포’란 표현이 보이는가? 이 시대의 어두워져 버린 섹스를 재정화(RE-purification)하기 위한 초석으로는 오히려 이 개념에 대한 이해가 의미 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느끼는 원초적인 감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공포’이다. 사랑이나 안정감, 부끄러움, 책임감 등은 나중에서야 배우게 되는 감정들이다. 왜 공포가 첫 감정인가. 세상에 나면서부터 어머니의 배속에서 느끼던 완전하고 안전한 느낌은 더 이상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먹여주지 않으면 죽고, 감싸주지 않아도 죽는다. 매우 죽음에 취약한 다른 말로, 자기가 상실할 위험이 매우 큰 상태인 것이다. 양육이 건강하면 이러한 자기상실의 공포가 크게 줄어들지만, 그렇지 않으면 평생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그러한 공포를 않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러한 공포는 성기 결합 시에 공명된다.
부부관계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이것이 이혼율로 위시되는 요즈음, 더 이상 건강한 섹스란 이미 불가능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모든 의미와 가치를 다 배제한 순수한 감각-절정감만-을 제공하는 음지의 섹스가 역설적으로 자기상실의 공포를 달래줄 위안처럼 되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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