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참 가슴 아픈 일이다. 구체적인 대상이 누구였든 간에 감정으로 깊이 얽힌 이를 상실하는 아픔은 쉽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며, 오랫동안 사람의 마음을 옭아맨다. 정신분석(psychoanalysis)을 창시한 프로이트는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을 우울증의 주요 요인으로 꼽을 만큼, 당사자에게는 끔찍한 고통이다. 워싱턴 의과 대학의 Thomas Holmes 박사 팀이 개발한 스트레스 측정 척도(Holmes and Rahe stress scale)에 따르면, 배우자와의 사망 혹은 이혼, 별거 등의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 가장 강한 스트레스 요인이 된다.
이별 후에, 관계를 잘 정리해야 하는 이유
이별의 순간에는 당황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이내 깊은 슬픔과 우울의 감정이 뒤섞여 참으로 힘든 시기이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상실의 아픔이 점차 잊히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마음의 생채기가 아물어 가기 시작하면, 고통에 힘겨워하던 생활도 이내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별의 과정과 그 순간의 기억들은 마음 깊은 곳, 의식의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 있는 상태일 것이다. 물론 다신 들추어보고 싶지 않은 기억이겠지만.
하지만, 분명 이별의 상처가 아물고나면, 이내 새로운 관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 관계를 준비하기 위해서, 새로운 이와의 관계에서 같은 아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관계 안에서 관계를 망가뜨리는 패턴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이를테면, 늘 비슷한 유형의 이들과 연인 관계를 가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별의 과정이 늘 동일한 전철을 밟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패턴이 어디서 왔는지, 타인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잘 정리하는 것은, 앞으로 만나는 이들과의 관계를 순탄하게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step 0) 충분한 애도(bereavement)의 시간을 가질 것
하지만 이별을 한 직후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는 것이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억지로 억누른다면, 환기되지 않고 쌓인 감정들은 더 극단적인 형태의 고통을 만들어낸다. 당장은 충분히 이 순간의 감정을 느끼고 흘려보내면서, 애도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이별의 순간에 나타나는 슬픔, 분노, 자책과 같은 복잡 다양한 감정들의 압력이 조금씩 낮아질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자. 슬픔을 부정하며 억지로 즐거운 활동을 하거나, 이별의 상황을 이성의 힘으로 합리화하려 하기보다는 가까운 이들에게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고, 위로와 지지를 받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관계를 잘 정리하는 것은,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보낸 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step 1) 감정이 얽히기 시작했던 순간을 되돌아보기
관계를 정리하는 첫 단계로, 상대와의 만남의 순간을 상기해보자. 상대방에게 내가 매력을 느꼈던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상대의 어떤 면에, ‘한눈에 반하게’ 된 걸까? 상대와의 첫 만남에서는, 마치 화학물질 간에 순간적으로 반응이 일어나듯, 순식간에 마음속의 그 무엇인가가 상대방에게 반응했을 것이다.
대개 상대방에게 가장 쉽게 반하는 경우는, 내가 가진 성격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위치해 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늘 감정적으로 결핍된, 성격적으로 냉담한 이라면, 헌신적이고 복종적이며,나에게 ‘퍼 주는’ 사람, 혹은 그 반대의 극단에 있는 나와 비슷한 냉담하고 감정의 변화가 크게 없는 이들에게 반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어느 쪽이든, 극단적인 성격 특성을 가진 이들을 연인으로 만나게 되는 일은, 안정적인 관계를 어렵게 만든다.
자신이 관계에 집착하고, 헤어질까 두려워 늘 전전긍긍하는 사람이라면, 외려 그런 불안을 자극하는 이를 연인으로 택하는 경우도 많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에게 학대받았던 이들이, 폭력적이고 잦은 음주를 일삼는 배우자를 만나게 되는 경우도 흔하게 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이를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라고 명명했고, 스키마 치료 이론에서는 스키마 굴복(schema compliance)라고 칭한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익숙함으로 인한 것이다.
내가 첫 만남에서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게 될 때, 같은 패턴이 반복되진 않았는지 돌아보도록 하자. 성격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있는 이들은 처음에는 매력적으로 보이나, 결과적으로 대개 내 마음 깊은 곳에 묻어놓은 불안을 상기시켜, 고통을 야기시킨다. 또, 관계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있음을 인지하고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상대와의 관계에서 동일한 패턴의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나도 모르게 학습된 익숙함과, 결핍된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본능의 양극단에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는 것이,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데 중요하다.
step 2) 상대와의 관계에서의 힘들었던 기억, 좋았던 기억을 상기해보기
연인과의 관계에서 어떤 부분이 나를 힘들게 했는지를 돌아보도록 하자. 금세라도 상대가 나를 떠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상대가 하는 말에 자존감에 상처를 입어 자괴감에 빠지지는 않았을까? 혹은, 상대에 대한 마음이 금세 식어, ‘역시 세상에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줄 사람은 없구나’ 하는 씁쓸함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 보자. 상대가 나에게 해 주었던 어떤 말, 어떤 행동이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던가? 어떠한 장면에서 관계 안에서의 충만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나?
좋았던 기억, 괴로웠던 기억들 모두 내가 나와, 상대, 그리고 둘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 즉 스키마(schema)의 측면에서 바라보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가 어떠한 관점에서 관계를 바라보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다면, 상대는 바뀔지라도 자신의 무의식에 의해 비슷한 패턴의 관계가 형성되며, 결국 관계에서의 고통은 반복된다. 감정적 박탈(emotional deprivation)을 깊게 경험하며 성장한 이라면, 상대방이 아무리 사랑을 표현해도 성에 차지 않을 수 있다. 자신에게 근본적인 결함과 문제가 있다고 느낀 이라면(defectiveness, 결함의 스키마), 상대의 사소한 말에도 쉽게 상처받을 수 있다.
즉, 관계의 형성과 형태, 그리고 결과가 상황과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닌, 마음의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던 무의식, 즉 스키마가 좌우하게 된다.
step 3) 헤어짐의 과정은 어떠했는가?
헤어짐의 과정에 대해서 생각해 볼 일이다. 만남의 끝이 누구나 그러하듯이, 표면적으로는 잦은 말다툼과 갈등이 이별의 이유가 된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무의식 아래의 취약함과 아픔을 자극하는 촉발 사건이 있지는 않았을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관계를 늘 불안정하고 언제든 깨어지기 쉬운 것으로 여기는 이라면, 상대의 연락이 뜸한 것이 촉발 요인이 된다. 자신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해 줄 사람이 없다는 ‘정서적 박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는, 상대의 사소한 행동에도 관계의 소원함을 느끼고는, 이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헤어짐의 과정에서 주고받는 말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마련이다. 이별이 쉬운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분명 더 과장되고 왜곡된 시각은 상황을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
관계에 대한 책임은, 혼자의 것이 아니다.
관계를 잘 정리하는 것에 더해서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부분은, 관계는 일방통행이 아닌 양방향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스키마가 관계를 왜곡시키는 만큼, 상대의 스키마 또한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이별의 원인을 전적으로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자책할 필요는 없다. 내가 가진 관계에 대한 시각과 더불어 상대의 부정적인 스키마가 관계의 악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떠올려 보자. 내가 상대에게 자극을 받은 만큼, 상대 또한 나의 관점과 행동 때문에 자극받았을 것이다.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는 미숙한 투사(projection)을 하거나, 전적으로 자신을 탓하며 자책감에 빠지는 것은 둘 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키마(schema)라는 색안경
내가 타인과 관계를 맺는 모든 과정이 스키마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스키마를 통해 보는 외부의 상황들은, 마치 색안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왜곡되고 필터링 된다. 만남과 헤어짐의 모든 단계에도 이러한 스키마의 영향이 드리워져 있다. 지금껏 맺어온 관계를 돌이켜 보며, 내가 스스로에 대해, 타인에 대해, 그리고 관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시각이 어떠한지, 어디에서 왔는지를 충분히 정리하는 것은, 분명 이 다음에 맺을 관계들을 잘 풀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현재의 이별은, 그저 다음의 만남을 준비하기 위한 연습이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위안이 될 것이다.
정신의학신문 홈페이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