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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크림빵 Oct 19. 2022

심리학자가 바이올린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

심리학자의 좌충우돌 바이올린 도전기 (3)

  포근했던 4월의 어느 토요일, 양재 시민의 숲 인근에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공연이 있었습니다. 단출한 악기 구성에 2바이올린 주자로 공연에 섰는데요. 아직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집을 나서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광해와 황진이 OST부터,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을 연달아 연주하면서 느꼈던 감정은 아주 복잡했는데요. 열댓 명이 하나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이 순간 여기에서 집중하고 있다는 그 감각에 아이처럼 으스대고 싶기까지 했거든요. 합주는 몸과 마음의 언어로 하나가 되는 원초적이고 즉물적인 감각에 가까웠어요. 마치 서로가 분리되어 있지만 하나의 버블에 들어가 있는 듯했어요.


  이제 바이올린을 배운지 만 2년이 넘었습니다. 이전에 포스팅으로도 남겼었지만, 순탄치만은 않았던 여정이었어요 [심리학자의 좌충우돌 바이올린 도전기]. 여전히 테크닉적으로 늘지 않아서 지치고 또 기계적으로 연주하면서 연습이 지겨워지기도 합니다. '음악을 느끼고 단팥빵만의 해석이 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듣는 요즘은 막막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난관들 앞에서 가끔 즐겁고 성장했다는 느낌에 취하기도 하지만, 결국 '왜 바이올린을 계속하는가? 정말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바이올린 소리가 좋아서였다면 그저 좋은 음반과 공연을 보고 들으면 그만입니다. 바이올린 하는 모습에 취해서라면, 그 이유도 분명히 있었지만, 아마 수개월 만에 그만두고 말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일까요?


  2년을 꼬박 매주 2번씩 학원을 다녔다는 건, 애당초 뚜렷한 목적이나 이유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바이올린 연주가 제게 무언가를 주었기 때문일 겁니다. 아주 단순한 기쁨이었지도 모르죠. 선생님에게 가끔 받는 칭찬, 어려웠던 프레이즈를 기계적으로나마 연주하기 시작했다는 쾌감,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종종 화젯거리가 된다는 신선함과 같은 것들 말이에요. 하지만 그 너머에는 '음악에 닿을 수 있다'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에는 음악을 느끼고 표현해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요.


  얼마 전에는 크라이슬러의 소품, 시실리안느와 리고동을 몇 주째 연습하다가 건조한 연주를 보다 못한 선생님이 외워서 연주해 보라고 제안했습니다. 이미 숱하게 연습하고 배웠기 때문에 몸이 기억해서 연주할 수 있었는데요. 왜 외워서 연주해 봐야 하는지를 바로 느낄 수 있었어요. 점과 선으로 연결된 악보를 내 안에 들여다 놓고 나니, 제 몸에 들어와있는 음표들을 좀 더 느끼게 되더라고요. 악보를 보지 않으니까 눈이 닫히고 귀가 열리는 게 느껴졌어요. 그러면서 '음악을 느끼고 해석하고 표현하라'라는 말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와닿았어요.  


  MBC 김정현 아나운서는 피아노 협주를 준비하면서 하나의 책을 나침반처럼 읽었다고 했는데요(인터뷰: 아나운서 김정현 OR 피아니스트 김정현). 바로 시모어 번스타인의 <With your own two hands: Self-Discovery through music (1981)> 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기발견을 향한 피아노 연습>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어요. 서문과 1장을 읽으면서 이 책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어요. 요즘 품었던 질문, '왜 바이올린을 계속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응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거든요. 무려 40년 전에요.


  번스타인은 삶의 경험이 연습과 연주에 영향을 주지만 반대로 연습과 연주가 우리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음악 연습이 거꾸로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죠. 음악은 그 자체로 생각과 감정을 통합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연습은 우리의 이성과 감성을 계속 연결시키고 통합시키게 하죠. 이런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이루게 하는 연습이 바로 우리가 자기통합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열쇠라고 보았어요. 눈을 감고 음표들의 구조들을 느끼면서 감각적으로 표현해내는 연습이, 우리를 완성시키는 훈련이 된다는 거죠. 나아가 체계적인 연습과 대인관계는 서로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어요. 음악의 조직적인 구조를 이해하면서 감정을 조화롭게 표현하는 것처럼, 대인관계를 일궈나가는 데에도 나름의 질서와 불확실성이 존재하거든요.


  번스타인이 보기에 생산적인 연습이란 자기통합을 촉진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연습을 통해 감정, 이성, 감각적 지각, 신체 협응을 총합을 만들어내는 전반적인 질서를 습득하고, 그 습득된 통합된 질서는 음악 밖의 삶에 영향을 미치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통합이 가능하고, 이를 통해 당신의 모든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총체성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믿는 데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제가 품었던 아주 막연한 희망, '어느 순간에는 음악을 느끼고 표현해낼지도 모른다'라는 희망과도 맞닿아 있어요. 그 믿음을 나침반삼아 바이올린 연습을 계속해보려 합니다.



F.Kreisler - Sicilienne & Rigaudon (Itzhak Perlman)

 Photo by Providence Douce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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