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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크림빵 Nov 01. 2020

문영씨에게

심리학자가 보내는 편지 -2

Photo by Kate Macate on Unsplash


  문영씨, 오늘은 물든 낙엽이 깔린 도보 위로 가을의 끝을 알리는 것만 같은 비가 내리고 있어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당신과 작별을 하고 두 계절이 지나가는 지금도 가끔 당신과 승훈이를 기억해요. 1년 전 가을 즈음에 지친 기색으로 중학생 아들 승훈이의 문제에 대해 저와 면담을 했었어요. 사소한 일에도 안절부절못하고 여러 신체 증상을 호소해서 학교 생활에 지장이 많았던 승훈이 말이에요. 승훈이의 보호자와 상담자로 만났지만 어쩐지 문영씨의 멀건 얼굴이 자꾸 마음이 남았어요.


  일을 하면서 아들의 불규칙한 학교 생활을 관리하고 집안일까지 해내는 문영씨가 안쓰러웠어요. 손쉬운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었어요.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고, 누구도 쉽게 발견해주지 않는 일들을 묵묵히 하는 행위는 그저 사랑이라는 단어로 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어요. 당신은 그렇게 배우자와 승훈이를 위해 사랑을 하염없이 베풀고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던 승훈이가 걱정되어서 모든 것을 먼저 도와주려고 했던 당신은, 어떤 순간 그 모든 일에 적응이 되면서 지쳤던 것 같다고 말했어요. 지쳐서 모든 걸 해주기는 하지만 열심히 할 수는 없었다고요. 조금은 신경질적이 되기도, 반포기 상태로 그저 승훈이가 원하는 걸 다 들어주며 지냈었다고요. 그러다 보니 원하는 것 말고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는 쉽게 포기하는 승훈이가 또래에 비해 어리게 느껴진다고 했어요. 그 말을 하는 당신이 혹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지 걱정됐어요. 당신은 매 순간 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그들 곁에 있어 주었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우리는 점점 승훈이를 위한 시간과 당신을 위한 시간을 쪼개서 시간을 쓰기 시작했어요. 승훈이 스스로 어려움을 이야기하거나 변화하고 싶은 의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신과 함께하며 무력해진 마음에 조금이라도 온기를 불어넣고 싶었어요. 홀로 그 모든 일을 해내고야 마는 당신이 스스로를 위해 베풀 시간도  있는지 궁금했어요. 그 빽빽한 일들이 단지 의무로만 남지 않도록 그 모든 일에서 조금은 편안해질 수 있기를 바랐어요.

  

  승훈이에게 규칙적인 일상생활을 지속하고, 학업에서 너무 뒤처져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 할 때 따라잡기 힘들지 않도록, 원하는 것을 잠시 지연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함께 토큰 경제를 수립하는 법을 연습했어요. 심리학적인 행동 원리를 활용하는 것이지만 진짜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는 부모도 함께 치료자가 되어야만 하는 과정이었어요. 당신은 승훈이를 위해서 이번에도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기록해왔어요. 자신의 행동에 따라 승훈이가 어떤 변화를 나타내는지 뿐만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감정들에 대해서도 솔직한 당신의 기록을 함께 읽는 일은 제게도 위로가 되었다고 뒤늦게 고백합니다.


  사실 토큰 경제를 지속하는 것은 부모의 합의된 태도가 중요했지만 배우자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당신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배우자와 대화하며 이 토큰 경제와 칭찬의 힘을 설득하려고 노력했고, 승훈이는 부모의 칭찬에 반응해서 조금씩 뭔가를 더 해내기 시작했어요. 자주 통제나 비난으로 승훈이를 대하는 배우자와 승훈이 사이를 중재하는 법을 함께 연습하기도 했어요. 당신은 '칭찬하기'의 힘을 즉각적으로 느꼈고, 점차 당신이 미리 도와주지 않아도 승훈이가 혼자 할 수 있다는 점 스스로 자각하기 시작했어요. 어릴 때부터 아팠기 때문에 앞서서 걱정하고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를 바라면서 먼저 도와줬던 일이 많았다고요.


  이 모든 과정에서 문영씨는 승훈이에게 감정을 물어봐주고 가능한 기다려주려고 노력했어요. 실망했던 순간, 또다시 지쳤던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승훈이는 자신이 불편하거나 힘들었던 점을 표현할 수 있는 청소년으로 자라고 있었어요. 그렇게 아이와 어른 사이의 독립된 존재로 나아가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당신을 위한 시간은 내고 있는지 틈틈이 묻기도 했어요. 이 험난한 토큰 경제를 수립하고 지속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진짜 승훈이를 위해서는, 문영씨를 위한 시간도 마련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어요. 그래야만 승훈이를 위해서도 힘을 낼 수 있다고 말했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시간을 내지 않을까 봐 걱정기 때문이었어요.


  문영씨, 추운 가을비가 내리는 날에 당신이 떠오르는 건 우리가 나누었던 시간들에 따뜻함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일까요. 당신을 보며 저 스스로도 나를 위한 시간을 내기로 다짐했었어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지 그저 상상해볼 뿐이지만, 두 사람이 투닥대며 집안일을 분담하고 있을 것만 같아서 웃음 짓게 됩니다. 추워도 춥지 않은 따뜻한 가을 주말입니다.



*이 글은 픽션입니다. 과거 경험들에서 일부 영감을 받아 각색하였으며 실제 사례는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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