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아이로 살아온 남편과의 여행
이번 여행에서는 남편의 과거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이 있었다. 그동안 남편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 아프셨다고 한다. 늘 아침마다 소 여물을 챙기고, 우유를 팔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 나가던 그 아버지를 돕던 기억. 도시로 이사 온 것도 자식 공부를 위해서였지만, 막상 남편 자신과는 그리 깊은 추억이 없었다고 했다.
반대로, 나는 아버지와의 추억은 많지만 안정된 일상을 공유한 기억은 거의 없다. 이와 비교하면 남편은 자신이 별일 없이 평범하게 자랐다고 말한다. 그러나 남편은 가족과 특별한 애정은 없는 것도 같다. 유일한 대상이 있었는데, 바로 마당에서 키우던 개와 할머니였다. 형들은 나이 차가 컸고, 동네에 또래 친구도 없어서, 유일한 친구는 그 개였다. 던져도 자신에게 돌아오고, 말없이 곁을 지켜주던 충직한 그 친구를 남편은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특히, 남편이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유난히 생동감이 넘친다. 동네에서 하토를 제일 잘 치셨다는 할머니는 그에게 각별한 존재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일하느라 바쁘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가장으로서 가정을 책임지셔야 했다. 큰형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가장이 되어 가족을 이끌어갔고, 그 이후로 형제들 모두 효자가 되었다.
남편은 여자친구로서의 나에게 서툴렀지만, 효자다운 면이 있었고, 참 착하고 진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입으로 덕을 깎아먹는 버릇이 있어도, 대체로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다. 하지만 아빠로서의 관대함은 다소 부족한 것 같다. 아들에 대해 유독 엄격하게 대할 때는, 그의 어린 시절이 어쩌면 그 배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들에게 덜 까칠하라고 하자, 남편은 "나는 어릴 때 저러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나를 완벽하다고 했다. 잔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해졌다. 정말 그랬을까? 나는 "어머니가 잔소리를 안 하신 건 성품이 좋아서지, 완벽해서 말이 없으셨던 건 아닐 것 같은데?"라고 물었다. 그러자 남편도 더 보탤 말 없이 대화를 끝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그 수수께끼가 풀린 것 같다. 남편이 어릴 적 다쳤던 이야기를 꺼내놓았을 때였다. 놀다가 크게 다쳤다는 이야기였고 그래서 치료는 어떻게 했냐고 물으니, 그저 저절로 나았다고 답했다. 그리고 "엄마가 몰랐어?"라고 묻자, "응. 말 안 했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제야 남편이 어릴 적 단순히 잔소리를 듣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돌봄조차 충분히 받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아플 때 가장 생각나는 사람이 엄마였을 텐데, 그조차 말하지 않고 혼자 감내해야 했던 어린 시절의 남편이 너무나 안쓰럽게 느껴졌다.
나는 부모님 사이에서 외교관처럼 중재하고 연결했던 어른아이였고, 남편은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하며 자신을 지켜내야 했던 어른아이였다. 어쩌면 이렇게 다르면서도 비슷한 부분이 있을까. 엄마가 되면서 나는 내 내면의 아이를 돌보며 스스로를 다독이게 되었지만, 남편은 아빠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돌보는 데 익숙한 모습이다.
그는 아이들에게도, 심지어 나에게도 무심할 때가 많다. 스파르타식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아마도 그가 스스로를 대하듯 아이들을 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남편의 무심함이 서운하게 느껴지던 날들이 쌓여가면서 이제는 그의 감춰진 힘듦을 함께 나누고 싶은 연민의 마음으로 변해간다.
어쩌면 낯설겠지만, 남편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걱정을 나누며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함께 갈아가겠다는는 마음을 담아 오늘도 남편을 곁에서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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