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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레미 Sep 26. 2024

렌즈 너머의 고통


사진기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을 전율과 설렘, 분노와 경악, 기쁨과 슬픔 같은 것이 고르란히 느껴지는 사진들이 있다. 케빈 카터의 <수단의 굶주린 소녀>를 볼 때도 그랬다.  사진기 내부의 어두운 방은 얼마나 깊은 슬픔으로 몸을 떨었을까. 순간의 빛이 보내온 정보를 자신의 몸에 아로새기는 동안, 사진기의 몸속을 떠다녔을 절망감과 흐느낌 같은 것이 사진 속에 묻어 있다. 세계의 각자에서 촬영된 보도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증오할 권리’라는 말을 중얼거리게 된다. 증오할 권리는 얻은 동시에, 사랑할 권리를 빼앗긴 아이들이 세계의 도처에 존재하는 한, 그들을 자신의 현재로 아프게 복원하게 된 사진기의 슬픔도 계속될 것이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절박하다고 홀로 중얼거리면서. 

  - 김선우의 사물들 中 사진기를 쥔 손 -



우리의 삶에서도 케빈 카터처럼 목격자로 살고 있을까?
나는 입시 제도라는 굴레 속에서 아이들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고, 때로는 그 선두에 서 있다. 

마치 나도 사진기를 들고 있는 것 같다.

 내 눈 속에 숨겨진 렌즈는 아무 말 없이 그 장면들을 혼자 담아두기만 한다. 

이 기록들을 어떻게 세상에 꺼내 보일 수 있을까? 필름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인화될까?


스스로 고통의 현장에 발을 들인 사진작가의 작업은, 어쩌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과도 닮아 있다. 

"주님 뜻대로 하소서." 하지만 목격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큰 용기와 끝없는 인내를 필요로 한다.




총성이 울리지는 않지만, 아이들이 살아가는 매일의 시간은 그 자체로 전쟁이다. 

그 아이들이 고통받는 동안, 그들의 부모와 다른 이들도 결코 평온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이곳의 공기가 체념과 독기로 가득 차 있는 듯, 이 비열함이 무겁게 짖누른다.



목격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아픔을 사진기로 담아내고, 현재 속에 묻어둔다는 것은 얼마나 버거운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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