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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dam Jan 02. 2023

풍경의 발견

고대 이집트 정원에서 데이비드 호크니까지

오늘은 '풍경화'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흔히 예전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이발소를 가면 달력의 배경이 약한 야리꾸리(?)한 여인의 수영복 사진이거나 아님 눈 쌓인 설산이나 푸르른 초록으로 둘러 쌓인 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화가 많았을 것이다.


그 만큼 동서양을 불문하고 풍경에 대한 우리의 동경심과 경외심은 시대를 초월하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비행기가 다니고 코로나 시국 전에는 아무리 먼 곳도 하루나 이틀이면 지구 반대편까지라도 

가서 내가 원하는 풍경을 맘껏 볼 수 있는 물리적 거리를 해결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대부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좋아하는 풍경화를 벽에 걸어두고 

마치 그곳에 있는 것같은 느낌을 대신하게 하곤 한다. 



Egypian Garden



위 작품은 이집트 스네프루 왕 치하에 델타를 통치했던 관리의 무덤 벽에 있는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을 그린 벽화이다. 포도밭, 연못, 물고기, 각종 새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정원은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운 공간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이집트 인들은 죽은 이의 무덤 속 부장품에

아름답게 꾸민 위와 같은 정원의 축소모형을 함께 묻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정원"의 개념은 바로 "낙원", 곧 파라다이스 였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4세기 경부터 정원을 가꾸었고 그들의 이상세계인 아르카디아 (Arcadia)를 꿈꾸었다. 정원은 제니우스 로시 (genius loci 충만한 영)이 지배하는 곳으로 신과 영웅에게 바쳐진 장소이며

자연의 체전으로 나누어진 정원인 호르투스(hortus)를 만들었다.  


로마사회가 성숙해감에 따라 후에 이것은 '쾌락의 정원'으로 대체되어 지상에서 낙원을 구현하려고 하였다. 기독교 중심의 사회인 중세에 구약 창세기에 묘사된 에덴 동산은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 중정으로 재현된다. 중정은 십자가를 연상케 하는 네 갈래로 갈라진 물길과 그 중심에 성모상이 있는 정원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을 회화적으로 표현 한 것이 바로 장미정원의 성모라는 작품이다.



로흐너, 장미정원의 성모


16세기 이후 종교적 권위의 약화와 절대왕정의 등장, 시민들의 권리 강화 등 세속권력의 강화로 인해

사회 전반적으로 광범위한 사회문화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전 회화의 모든 것을 대표했던 종교화를 제치고 세속화 장르가 점차 성행하게 되었다.

물론 서구사회의 영적인 범주는 여전히 기독교였지만 회화의 소재를 더이상 성서에서 따올 필요가 

없어지자 16세기 후반부터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장르화 같은 새로운 형태의 회화들이 확고한 입지를

굳혀 가면서 위상이 점차 높아지게 되었다.



Nicolas Poussin, Les bergers d'Arcadie(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풍경화의 탄생은 도시의 건설과 세상의 세속화, 더 나아가 자신이 사는 지역에 대한 긍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니콜라 푸생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라는 작품은 직접적으로 낙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낙원'은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배경의 역할만 하고 있다.

푸생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클로드 로댕의 그림은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화면의 전면을 지배하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 전면을 지배하고 있어 풍경화로서의 손색이 전혀 없어 보인다. 



클로드 로댕, 오딧세우스의 귀환


그러나 '오딧세우스의 귀환' 이라는 제목처럼 이 작품은 풍경화가 아닌 "신화화" 이다.

아직 풍경은 신화의 배경으로만 존재할 뿐이지 독자적인 미적 가치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클로드 로댕이 그린 풍경은 실제 풍경이 아니라 상상 되어진 아름다운 낙원의 풍경인 것이다.

이 아름다운 낙원의 풍경은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후 영국에서 소위 '영국식 정원'이라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실제적으로 구현된다.



Sylvester Shchedrin - Terrace at Sorrento, 1826


자연풍광을 풍경으로 인식하는 행위는 자연과 관련을 맺는 주체의 정립을 전제로 한다.

잃어버린 낙원으로서의 풍경은 풍경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전제로 한다.

낙원은 아름다워야 하고 풍요롭고 온화해야 한다는 관념이다. 이런 관념에 가장 현실적으로 부응하는 장소는 4계절이 온화한 지중해 연안의 국가들이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 <베짱이>에서 주인공인 풍경화가는 이렇게 한탄한다. 


"도대체 해는 언제 나타나지? 해도 없는데 어떻게 맑은 날의 풍경을 계속 그리냔 말이야!!"




meindert hobbema, The Avenue at Middelharnis , 1689



흐리고 우울한 날씨가 이어지는 북유럽의 풍경화가들의 등장은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한 긍정, 조국애였다.  

그들은 아름다운 신전의 폐허가 있는 이태리 풍경 대신에 자신의 조국을 그렸다. 

네덜란드의 산천에는 그리스나 이태리처럼 대단한 신화가 깃들어 있지 않다.

그들의 조국애 깃든 자부심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긍정의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그럼으로써

풍경화라는 새로운 유형의 장르를 완성하게 된다. 

미술사학자 곰브리치는 "네덜란드 화가들은 미술사상 최초로 하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세계의 한 부분을 그렸을 뿐이며 그것만으로도 영웅적인 이야기나 

희극적인 테마를 다룬 그림만큼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라고 말하고 있다.



Alexey Savrasov, The Rooks Have Come, 1871



네덜란드 화가들 만큼이나 조국애가 발동된 또 한번의 예가 러시아의 풍경화이다.

러시아 자연의 풍부한 얼굴을 최초로 주목한 사람들은 이동파 화가들이다.

이전의 아카데미 풍의 풍경화는 아름다운 풍경을 그린 그림, 그려질 가치가 있는 풍경을 

그린 그림을 의미했다. 아름답고 그려질 가치가 있는 풍경이란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남국의

이상향을 연상시키는 그림, 구체적으로 이태리 등의 지중해 지방을 그린 그림이었다. 

추운 겨울이 일년의 6개월 이상 지속되는 러시아의 자연이 그림의 주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에 대한 애정을 함양하고자 했던 이동파 화가들은

풍경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 


위 작품을 그린  러시아 화가 사브라소프(1830-1897)는 이런 새로운 풍경화의 시작을 한 화가이다.

1871년 제 1회 이동파 전시회에 출품된 <산까마귀들이 돌아오다>는 사브라소프의 최고의 작품이자

러시아 풍경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화면은 언덕의 능선에 횡으로 잘려져 있어 원근법적인 깊이감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파격적인 구도를 이루고 있다. 흐린 날 긴 겨울의 침묵을 깨고 자작나무 위로

어수선하게 산까마귀들이 날아든다. 언덕 아래에는 러시아의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목조 교회가 눈에 띤다. 이 작은 신의 집은 그 곳을 찾는 사람들만큼이나 소박하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자연의 위력을 느끼게 하는 장대한 장관도 아니고  물레방앗간이나 오리들이 있는

아기자기한 전원 풍경도 아니다. 그저 물을 열고 나가면 즉시 볼 수 있는 러시아 시골 마을 어귀의 너무도 흔한 풍경일 뿐인 것이다. 화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산까마귀가 둥지로 돌아오는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일을 매개로 해서 깨닫게 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자연의 미묘한 변화인 것이다.



Casper david friedrich ,  The Abbey in the oak wood, 1809-10



18C말-19C초 유럽은 대대적인 발굴 붐에 휩싸인다.  전설 속에 있던 폼페이의 유적지가 1738년 발견되어 본격적으로 수많은 유적들이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 양식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교양을 갖춘 신사라면 누구나 유적지가 많은 이탈리아를 짧게는 몇달, 길게는 몇년을 여행하는 그랜드 투어도 본격화되면서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풍경화도 유행하게 되었다.


건축물은 중력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거부하고 지상에 세워지는 것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의미하며 인간과 자연과의 긴장관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속성 때문에 "페허"는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 인간을 표상하게 된다. 폐허를 미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데는 생명의 유한성과 자연에 대한 상대적 왜소감, 페허를 통해 거대한 자연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자기 숭고의 자부심이 중복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감각은 위 작품을 그린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낭만주의 풍경화에서도 발견된다.

프리드리히의 낭만주의적 풍경에는 자연의 무한함과 위대함, 그리고 그 앞에서 절대적 존재를 자각하는

유한한 자아가 느끼는 경외심이 담겨있다.  이 무한하고 절대적인 자연적 대상 앞에서 느끼는 감정을 

"숭고미(Sublime)" 라고 한다. 



Casper david friedrich,  Moonrise by the sea, 1822


격정적인 자연에 대한 감동은 단순한 감정이입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색채의 세계에 대한 탐닉으로 이어졌다. 





개인적으로 프리드리히의 작품들을 너무도 좋아하는데 특히 뒷모습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그린 

작가로도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뒷모습을 좋아하다보니 추후 이런 주제를 가지고 따로 포스팅을 할 예정이다.



claude monet, Impression Sunrise , 1873


19세기 이후 자연광선 하에서 진실된 그림을 그리고자 아틀리에를 뛰쳐나간 외광파 화가들과 인상주의 화가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아름다운 자연풍경이었다. 아틀리에에서의 잘 조율된, 계산된 조명이 아닌 매순간 변화하는 자연광의 아름다움에 그들은 매혹되었다. 피사로, 시슬리, 모네 같은 작가들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풍경화와 자연광을 가장 잘 반사하는 존재인 "물"은 그들이 가장 사랑했던 회화의 대산이었다.


모네의 수면은 색의 삼라만상이 담긴 우주와 같이 펼쳐졌다. 

물이 너무 좋고 그 물에 반사되는 빛의 변화가 너무 아름다워 모네는 결국 자신의 집에 연못과 호수를 만들고 오랜시간 정원에서 여러가지 그림을 그리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련 시리즈도 바로 자신의 집에서 그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워낙 작품이 넓고 크기 때문에 일반 작품처럼 액자로 만들어 한쪽 벽에 걸어둘 수가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모네는 수련시리즈를 여러 작품에 걸쳐 완성하면서 그의 뜻을 피력하기도 했는데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이 이 작품을 보는 동안 마치 모네 자신의 정원에 놀러와 온몸으로 자신의 정원을 느낄 수 있게 되길 바란다는 마음으로 그렸다고 한다.




이렇게 자신의 키만큼 크고 긴 작품을 그려 지금도 우리가 자주 볼 수 있는 그의 수련 시리즈를 만든 것이다. 이 시기의 풍경화를 그린 화가로 폴 세잔의 풍경화도 많이 이야기 하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의 경우엔 폴 세잔은 정물화나 인물화를 더 좋아하다보니 이번 포스팅에서는 모네의 풍경화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David Hockney , bigger tree near water


마지막으로 소개할 화가는 영국의 유명한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 이다.

현존하는 영국 최고의 팝아트 화가로서 우리나라에서도 몇년 전 개인전으로 했던 화가이고 

워낙 인기가 많은 화가이다.

모네의 수련 시리즈 처럼 호크니의 여러 작품들 중에 큰 나무 그림을 그린 작품이 몇 있는데 

큰 나무 그림을 그린 작품들 중 위 작품을 소개 하고자 한다.





호크니는 2006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과 함께 아침에서 석양 무렵까지 다양한 빛의 모습을 담아낸 또 다른 <울드게이트 숲(Woldgate Woods) 시리즈>가 유명하다. 

위 작품도 자세히 보면 <격자 형식>으로 되어 있다. 부분, 부분 작은 작품을 그려서 그것을 하나로 모아 대형작품으로 만든 것이다. 스케치를 토대로 컴퓨터 기술을 도입한 대형 풍경화로 자신만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이 1,019억원에 낙찰, 생존작가 최고가(작품 하나가 1억짜리 소형 아파트 천 개의 값)이라고 하니 과연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이 작품을 과연 모네가 살아있다면 보고 어떤 평가를 할까?

사뭇 궁금해지는 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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