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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푸름 Nov 16. 2019

한번쯤은

잠시나마 진심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할머니 병간호는 쉽지 않았다. 하루 종일 할머니와 붙어 있으면 할머니는 내게 아픔을 호소했다. 여기가 아프다, 저기가 아프다며 나를 찾았다. 병원에 가도 치료가 되지 않는 병을 나라고 별 수 있겠나. 나는 할머니가 아프다고 하면 그저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좋은 말도 자꾸 들으면 힘든 법인데, 듣기 싫은 말을 하루에 10번도 넘게 들으니, 짜증만 앞섰다.

“아이고, 속이 또 씨리 고만,”

“속이 왜 또.”

“속이 쓰려. 콜라 좀 가져와. 콜라를 먹어야 속이 낫제.”

“아니, 지금 속이 쓰린데 콜라를 먹으면 더 쓰리지. 안 돼.”

“콜라 좀 가져오라니께. 그거 먹어야 혀.”

“안 된다니까. 그거 먹으면 더 아퍼.”


그런 실랑이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한다.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할머니의 콜라 시위를 무시하지만, 할머니는 고집과 집요함으로 일관한다. 결국 할머니가 이긴다. 콜라를 사드리면 끝인 줄 알았건만 또 다른 곳이 아프다고 나를 보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뭐라고. 콜라 마음껏 드시게 하고 나도 웃는 얼굴로 대할 걸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위가 약한 할머니가 계속 콜라를 드시면 분명 건강에 해가 됐을 거다. 또 위를 아파하는 걸 보면서 나는 나 자신을 자책했을 거다. 결국 나는 힘들었을 거다. 어디로 가든 힘들 바엔 할머니가 해달라는 걸 다 해드릴 걸. 할머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드릴 걸 후회한다.


사실 인생에서 건강이 중요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이해받고 존중받길 원한다. 그래서 자유는 중요하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할머니에게 해가 되는 걸 알지만 콜라를 드릴까. 아니면 콜라를 안 드리고 매번 싸워야 할까. 고민했다.      


지금이라면, 할머니에게 콜라를 원 없이 드시게 할 거다. 콜라를 못 드시게 하는 건 어쩌면 나의 욕심이었다. 조금 더 건강히 할머니랑 오래 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됐다. 건강한 사람들도 콜라를 마시고 싶은 욕구를 참기 힘든데. 할머니는 얼마나 애가 탔을까. 한 번쯤 져주고 할머니에게 화를 덜 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후회는 미래 내 삶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다이어트를 할 때, 꾹 참다가 한 번쯤은 먹고 싶은 걸 먹게 해 주기, 다른 사람의 무리한 요구를 한번쯤은 들어주기. 나의 철칙과 고집을 조금씩 내려놓았다. 자기 생각에만 너무 빠져있다 보면 중요한 가치를 놓치게 된다. 가령 사랑하는 이의 웃음이나, 즐거움. 이 글을 읽는 당신만이라도, 오늘 하루 만은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를 너그러이 받아들여 주는 게 어떨까. 진심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한번쯤은'하고 넘어가주길. 그 대가로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 받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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