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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원 Jan 22. 2021

마을사업엔 누구의 얼굴이
없을까 3/3편

민간위탁제도 어디까지 왔을까

[2020 프로젝트] 도시소수자정치연구모임(이하 ‘도소정연’)은 도시 공간을 바탕으로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과 정치를 고민하는 지역활동가들의 연구모임입니다. 3명의 지역활동가가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며, 소수자·약자의 목소리에 주목하고, 일상 속 운동의 가능성을 공유하며, 삶과 정치의 관계 맺기를 꾀합니다.

<얼굴 없던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도소정연 구성원들의 문제의식을 풀어내는 사유의 장입니다. 책「모두를 위한 마을은 없다」를 읽고 나눈 대담의 공유를 끝으로 도소정연의 활동을 마무리합니다.


▶ 이야기하는 얼굴들 (가나다순)

신원 : 어쩌다 사람을 좋아하여 지역에서 활동합니다. 일상 속 소수자의 정치를 고민합니다. 주로는 청소년•청년들과 만납니다.

태환 : 세상 모든 청년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기 바라는 연구활동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도 일합니다.

이응 : 커피 분쇄와 고양이 털 냄새를 좋아하고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럼에도 모든 고양이가 고양이로서 살아가고 내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한 안전하고 평화로운 내 삶의 터전을 위해서 동네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나가려 합니다.


민간위탁제도 어디까지 왔을까

태환 제가 요즘 듣고있는 대학원 수업 중 하나가 ‘시민사회와 사회적 경제’에요. 시민사회 전반에 대한 것을 배우는데 시민사회의 정의부터 쭉 나오니까 마을공동체까지 나오더라고요. 그리고 수업의 과제가 매주 특정 주제에 대한 한 페이지 짜리 짧은 글을 쓰는 거에요. 물론 저는 신랄하게 쓰죠. 지역활동가 입장에서 느낀게 너무 많으니까. 

교수님이 어떤 시민단체에서 십년 이십년 활동하신 분인데. 코멘트를 하시는데 굉장히 길게 코멘트 하시더라고요. 제가 작성한 글에서의 문제점, 시민사회 단체의 현실 같은 것들이요. 특히 지역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한계점들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그 수업 듣는 분들 중에 중간지원조직에서 일하시는 분이 계신데 그분도 저랑 똑같은 문제의식이 있더라고요. 마을공동체 사업을 해야되는데 주체는 없고 ‘관’만 있다는 점이죠.

서산시가 “주민주도” 지역사회 변화를 견인해 나갈 지역 리더 양성을 위해 주민자치아카데미를 시작한다고 한다. (출처 굿뉴스365)

민관 협치라고 하는데, 민이 너무 없으니까 관이 억지로 민을 만들어내요. 공론장의 경우에도, 주제도 진행도 관이 세팅하고서 억지로라도 해야하니 원래 활동하던 사람들을 끄집어내요.

거기에 예산이 있으니까 하고싶은 걸 해보라고 하고. 그리고 사실 관도 자기들의 성과를 낼 수밖에 없기도 하고. 더해서 거기에 끌려다니면서 휘둘리는 민간의 마을 주체들이 있는거죠.

이 구조가 몇 년간 반복되어 왔고, ‘주민자치’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거든요. 마을공동체나 사회적경제도 마찬가지인데, 개인적으로 이러한 정책 진행에 환멸나요. 신원이 얘기했던 것처럼, “도대체 이걸 왜 하는 거야?”싶어요.

주최단체 관계자는 “... 잦은 정치적 시비와 민관위탁의 이해부족, 경직된 관리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 직영으로 전환됐다"고 한다.(출처 충북일보)

이응 그동안 민간위탁 제도를 평가하면서 민간영역에서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한 부분이 민과 관이 동등한 권력을 갖고 소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죠. 관에서는 민간이 행정 절차와 언어에 무지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고요.

요즘 제가 드는 고민은 관이 제시하는 평가 척도라는 게 민간위탁제도랑 안 맞다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래서 ‘민’이 민간위탁제도에 뛰어든 이유와 해내고자 한 목표가 ‘무엇’이었고, ‘어떻게’해왔는지를 시민사회 안에서 좀 더 토론하고 언어를 만들어내면 좋겠어요.

제 기준에 민간위탁제도가 필요한 이유는 ‘관’은 언제나 사람의 시간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 시간의 공백이 제도의 사각지대가 되어서 누군가는 계속 ‘시민’ 바운더리 밖으로 튕겨나갈 수 밖에 없죠.

그러한 튕겨나가진 삶을 포착하고 그 과정을 되짚어내는 민간영역의 전문성과 이것을 보완해내는 행정실행력이 확보되어야 시간의 격차가 줄어들 수 있겠죠.

그런데 행정이 단지 운영의 책임을 떠넘기는 정도로만 이 제도를 생각하고, 민간은 새로운 사고력을 펼치지 못하고 행정의 지시하에 수탁하는 상황은 전혀 새로운 모델이 아니죠. 이미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대로 그저 단계를 쪼개고, 책임을 분산시켜서 착취할 사람을 늘리는 ‘하청’ 아닌가요?

그렇게 무책임하게 한 발 더 시민의 삶에서 멀어져가는 방식이 지금의 민간위탁제도라면, 정말 그 정도만 할 것이라면 이 제도는 사라져야죠. 관이 시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제도를 구상하고 직접 운영하는 것으로 책임을 명확히 해야죠. 그것이 ‘관’의  최소한의 기본 역할 아닌가요? 그걸 왜 다 민간영역에서 ‘받아내서’ 그저 ‘대리’ 수행해요.

민간위탁제도 속 노동자의 고용불안정성에 대한 고민과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수탁을 받은 민간? 위탁을 준 행정? 노동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노동자? (출처 오마이뉴스)


III. 에필로그 각자 생각하는 문제해결 포인트


파편화와 네트워크

신원 지역 안에서 각 영역의 실천과 운동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정치적인 효과 혹은 변화를 일으키는 움직임으로 묶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은 각자  알아서 하는 것에 가깝지 않나요. 앞으로는 운동이 더 개별화되지 않을까, 파편화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있어요.


태환 그래서 보통 지역사회/시민사회 잘 살려내자 이런 취지로 지역의 네트워크를 구성하죠. 그런데 문제는 시민사회 안에서도 합의가 안 되는 거예요. 이 네트워크가 왜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어떤 형식으로 어떤 형태로 필요한가에 대해서요.

예를 들면 신원이 말한 대로, 저는 (지역에서) 네트워크가 무조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얘기도 많이 했었거든요. 지역을 위한 변화를 합의를 통해 함께 설계한다면 큰 그림을 보고 같이 갈 수 있죠.

그런데 합의조차 잘 안되는 상태로 누군가는 이걸 하고 싶으니까 사람을 끌어오고, 누군가는 참여해달라니까 그냥 들어오고, 누군가는 욕심이 나니까 자꾸 들이밀고. 이렇게 막 얼룩덜룩하면서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거죠. 그러면서 ‘시민사회가 역시 안 되나 보다’하면서 앞으로 고꾸라지고. 이런 모습들이 아직도 있는 것 같아요.

2020 지역사회 민민 협력기반 조성사업 공모 포스터 출처 : 서울시 홈페이지


소통? 무엇을? 어떻게?

이응 저는 그게 사람이 소통하는 과정에서 포착된 문제인 거 같아요. 사람이 문제다.(웃음)


태환 사람이 답이다 라고 생각했는데(웃음)


이응 ‘무언가를 같이 한다’는 건 되게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서로 협의를 하면서 공통의 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잖아요. 그런데 자신의 욕망은 솔직하게 말 안하고, 그저 당위성 차원으로 ‘필요하다.’, ‘중요하다.’, ‘살려야 한다.’라는 감각으로 모이면 서로 이야기를 쌓아갈 수 없게 되죠.

어떤 가치의 현재적 의미를 고민하자가 아니라 ‘시민사회’ 그 자체를 살려야 한다로 가면은,,, 그리고 이 당위성에 다른 의견을 내면 개인의 ‘몰이해’로 받아들이고 끝나요.

정말 대화를 할 수가 없죠. 이건 진짜 한국의 얼인거 같아요.(웃음) 식민지 남성성. 누군가 변화를 요구할 때, 문제를 직시하고 함께 변화하는 게 아니라, 그저 요구하는 이가 발언하지 못하게 하고 기존의 관점과 가치, 그것이 했던 영향력을 그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살려야한다.’라는 것.


이응이 웃으며 말한 ‘식민지남성성’ 개념이 궁금하시다면 책「한국 남성을 분석한다」를 읽어보세요.


태환 저는 ‘시민사회를 살려야 한다”는 당위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시민사회를 살리고 싶다”는 욕망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게 “살려야 한다” 라고 하면 너무 당위적이어서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없어요.

근데 “나는 살리고 싶은데 너도 살리고 싶니?”라고 솔직하게 물어보았을 때 “나는 안살려도 된다고 생각해”  하면 어쩔 수 없고. 다른 사람을 또 찾아야 하는거죠. 그냥 다르면 다르다고 인정하고 각자 갈 길을 가던가 아니면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끼리 다시 모이던가.

이러한 자기 욕망을 솔직하게 끄집어내어 이야기하고, 그 욕망에 동의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게 ‘정치집단’이라고 생각해요. 공동의 이해관계가 생기고, 공동의 목표가 도출되고, 공동의 변화를 원하게 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지역에서 활동해본 결과, 뭔가 정치적인 것을 굉장히 꺼려하고 그 의미를 걷어내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시민사회 안에서 갈등이나 대립이 발생하는 것도, 그러한 인상조차도 생기길 원치 않구요.


이응 물리적 기반이 없기 때문에 솔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단지 돈뿐만이 아니라, 현재를 인식하고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지에 토론하고 가치관을 형성할 인적 자본(사람)도 사회적 자본(관계망)도 없으니까요. 그렇게 그저 주어진 사업에 따라서 인식이 끌려가는 것이죠.

제도의 욕망에 끌려가지 말고 자기욕망을 말해야 서로 경합하면서 지향점을 정리하고 공통의 목표점을 만들어낼텐데 말이죠.

솔직할 수 없다면, 그저 통용될 만한 ‘보편’의 말을 할 수 밖에 없죠. 그렇게 그 정도의 조직문화가 형성되는 것 같아요. 기존의 질서에 따라 말할 것과 말하지 않을 것이 정해지기 때문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다 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한 발짝만 더 들어가서 보면 모두가 동일하게 알거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원래 그런거야'라는 희미한 근거를 두고 좋게 좋게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 봐도 서로 다 알고 있다는 ‘공동체’의 ‘공동감각’에선 그것을 알지 못하는 누군가는 눈치없는 사람이거나 외부자일테니까.

한국에선 종종 권력이 많은 사람이 권력이 적은 사람에게 편하게 얘기해보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정작 편하게 얘기하지 못하는지는 이유는 파악하지 않는다.(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이러한 문화가 어떤 구조 속에서 어떻게 고착되기 쉬운가를 보는게 필요하죠. 사회에서 누군가는 점점 더 다수의 위치에 서는 때가 늘어나고, 누군가는 계속 기존의 문법과는 다른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소수의 위치에 처해요.

그런데 모두가 서로에게 질문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소수자의 위치에 선 사람에게만 질문이 향하고 다수’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길 요구하는 일이 반복되곤 하죠. 일방적으로 설명해내야만 하는 위치에 오랫동안 서있다면 자기 검열의 촉이 점점 날서게 되죠. 무엇을 말해도 되거나 말하면 안되는지 혹은 말 안해도 넘어가는지 경향과 패턴을 알게 되죠. 소수자로 살아가는 피로감은 정말 큰일이에요.


신원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패배감으로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변화는 불가능하다’, ‘사회는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는 인식이 사회운동 전반에 있잖아요. 한편으로는 이러한 인식이 이해되지만 어떻게 해야할지도 막막하네요,,, 그래도 지금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가 잊고 있던 것들을 좀 환기시켜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태환 시민사회 활동하는 또는 마을공동체 활동을 하는 사람들과 터놓고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우리가 이런 걸 잊고 있었고 이런 게 문제였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줘야할 것 같아요. 그래야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 내고 싶은 목소리, 고민하는 내용을 동네에서도 알릴 수 있을테니까요. 오늘 책 읽는 것도 이야기 나눈 것도 재밌었습니다. 


이응 오늘 여러번 말한 것 처럼 우스갯소리로 종종 말하지만, 실제로도 ‘사람이 문제다’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람을 싫어하다보니 사람들과 함께 변화를 만드는 시간을 잘 버티지 못하고 지쳐서 내가 제일 먼저 나가떨어질 때가 있어요.

그런데 제가 최근에 배운 점은 “사람이 변화한다는 것? 아주 어려운 일이 맞다. 하지만 아주 긴 시간 서로의 토론이 쌓이면 이해가 생긴다. 이것을 1차 목표 지점으로 두고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배움을 통해 고민의 방향이 좀 더 분명해졌어요. 어떻게 긴 시간을 같이 호흡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가진 말이 좀 더 잘 들릴 수 있도록, 그리고 상대의 말을 좀 더 정확히 들을 수 있도록 그 대화 자리를 떠나지 않을 힘을 무엇으로 키울 수 있을까? 그건 같은 테이블에 있는 나의 동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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