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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원 Jan 14. 2021

마을사업엔 누구의 얼굴이
없을까 2/3편

'마을사업’ 말고, 다른 걸 상상할 수 있을까

[2020 프로젝트] 도시소수자정치연구모임(이하 ‘도소정연’)은 도시 공간을 바탕으로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과 정치를 고민하는 지역활동가들의 연구모임입니다. 3명의 지역활동가가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며, 소수자·약자의 목소리에 주목하고, 일상 속 운동의 가능성을 공유하며, 삶과 정치의 관계 맺기를 꾀합니다.

<얼굴 없던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도소정연 구성원들의 문제의식을 풀어내는 사유의 장입니다. 책「모두를 위한 마을은 없다」를 읽고 나눈 대담의 공유를 끝으로 도소정연의 활동을 마무리합니다.
▶ 이야기하는 얼굴들 (가나다순)

신원 : 어쩌다 사람을 좋아하여 지역에서 활동합니다. 일상 속 소수자의 정치를 고민합니다. 주로는 청소년•청년들과 만납니다.

태환 : 세상 모든 청년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기 바라는 연구활동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도 일합니다.

이응 : 커피 분쇄와 고양이 털 냄새를 좋아하고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럼에도 모든 고양이가 고양이로서 살아가고 내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한 안전하고 평화로운 내 삶의 터전을 위해서 동네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나가려 합니다.


‘마을사업’ 말고, 다른 걸 상상할 수 있을까?

신원 마을부터 보자면, 우선 마을에 대한 합의된 개념이 없거나 서로 달라요. ‘마을이란 형태가 도시라는 공간에서 꼭 지향해야하는 개념인가’에 대한 평가나 판단이 없이 박원순 행정에 끌려왔던 측면이 크지 않을까요.

공동체는 필요한데, 공동체의 향수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강하게 끌어당길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마을이었기 때문에 결국 마을이 호명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과거에 인식했던 마을과 지금 우리가 호명하는 혹은 호명해야하는 마을은 다를 거잖아요. 분명 다른 모습일텐데, 구체성이 없는 상태에서 마을 사업을 해온 것은 아닌가. 예를 들어서 아파트 공동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잘되는 사례들도 있지만 이전에 없던 공간에서 펼쳐지는 공동체는 어떤 모습들로 구현될 수 있을까하는 구체적인 비전들이 없지 않았나요.

개념어로서’ 마을’은 주로 ‘시골’의 의미를 포함한다. 도시에서의 마을은 꼭 ‘마을’이여야 할까? (출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마을일 수 있을까도 의문이에요. 예를 들어서 동이나 구라는 행정구역으로 마을이 나뉘는 걸까?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동네는 어디까지인 걸까? 왜 박원순 행정은 ‘마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무엇의 대안으로서 도시 속 마을을 호명한 것일까? 농촌에서 공동체운동과 도시에서 공동체운동은 접근 방법부터 분명 다르잖아요.

만약 마을이 아니라면, 우리는 도시에서 어떤 공동체를 실천하고 조직할 수 있을까도 궁금해요. 꼭 주거지를 바탕으로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일상의 근거지가 주거지가 아닌 직장 근처일 수도 있는데, 그러면 어떤 교집합으로 공동체를 모아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더불어 마을이 꼭 필요한 것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도시•소수자•정치의 입장에서 마을이 필요한가도 판단해야 할 것 같아요.

마을을 행정구역으로만 나눌 수 있을까? 마을에서 살고 있는 주민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마을이라고 생각할까? (출처 도봉구청)

다음으로 우리(시민사회)가 상실한 게 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예를 들어 포스트 박원순이 도래한 지금, 박원순 없이 앞으로 계속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가. 하더라도 더욱 행정 중심으로 재편되겠죠. 행정의 요구에 더 맞춰지고 길들여질 것 같아요. 만약 그랬을 때, 우리는 우리의 자체적인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가 고민이 들더라구요.

어떤 민간위탁기관을 보면, 재위탁을 목표로 두기 때문에 행정의 요구대로 해야할 것이 많아요. 1년에 오가는 사람수도 몇천명이 되더군요. 그런데 사업을 늘리고 사람수를 많이 확보하는 것만을 운동으로 볼 수 있는가 싶어요.

어쩌면 시민단체들이 민간위탁을 다 접고 직영으로 가는 게 맞지 않을까요. 오히려 지자체 권력이 직접 운영하면서, 운영방향이나 센터장 위촉 등을 시민사회와 협의 하는 것이 바람직해보여요.

결국에는 누구를 위한 마을인가. 누구를 위한 마을이어야 하는가. 지금 마을활동의 주체들이 어떤 가치나 이념을 공유하며 활동하고 사고하는가. 운동조직들이 주체들과 함께 이를 확인하고 나눠야하는데 안되고 있어요. 마을활동에 유입되는 경로가 다양해졌으니 더욱 필요한데 말이죠.

우리가 함께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고 활동을 하는 목적과 비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누지 않아온 관례가 기존의 시민단체나 운동 안에서 더 관습화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이게 탈정치랑 연결이 되겠죠. 비전이라는 것이 이제는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까.

중랑구 청년주택 건설을 반대하는 현수막. 유목민의 대표격인 청년 세대는 끊임없이 주거 불안에 시달린다. (출처 비즈한국)

도시 속 유목민과 정주민(편집 주: 여기서 유목민 및 정주민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겪는 도시 속 주거불안정 정도에 따른 비유적 표현 / 누군가는 자기 집을 가지고 살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임대로 전전해야함)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예전에는 유목민이든 정주민이든 마을에서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유목민과 정주민을 동일한 주체로 상정하는 지역운동이 가능한가 싶어요. 오히려 유목민이 정주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하지 않을까요. 유목민의 경우, 유목민일수 밖에 없는 건 불안정한 기반이 사실 핵심이잖아요. 그렇다면 불안정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을 얘기하는 방향으로 운동하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싶어요.

결론은 ‘억지로 엮지 않아야 한다’예요. 각각의 고유한 활동영역이 있고, 사이사이 일상과 지역에 기반이 되는 교집합을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호명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아요. 대신 마을을 호명할 때, 우리는 누구를 어떻게 엮어야 하는가 라는 고민으로 책을 읽었어요.

최근 중랑구의회는 청년주택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서울청년진보당은 이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출처 오마이뉴스)

이응 제가 책을 보면서 느낀 첫번째, 서로 다른 생각으로 마을만들기 사업을 하고 서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 두번째, 그렇기에 페미니즘이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것이에요.

마을이라는 명칭을 쓰면서, 마을을 만들자, 마을이 사라졌다, 마을이 파괴됐다 이런 단어들이나 말들이 있어요. 거기서 호명하는 마을을 보면 도시랑 대비되는 단어인데 동시에 지리적으로 도시 속에 존재하는 곳으로 계속 이야기되더라고요.

서울에서 마을만들기 사업은 수도권 외의 공간에 현존하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삶의 형태를 지워버려요. 그리고 돌아갈 수 없는 고향 이미지로 납작하게 만들고요. 삶의 쾌적함과 안전한 시스템에 기반을 둔 도시 시스템 속에서 사람 살기 좋은 곳인 ‘마을’을 다시 만들자라는 슬로건은 환상 같아요. 

인지상정과 개인 행위의 선을 굉장히 높이 평가하는 것이 과연 우리가 회복해야하는, 상실한 가치인 것인가? 그 인식부터 짚어보고 싶어요.

서울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야했던 이유. 그리고 모여든 사람들 중 누군가는 집에 들어갈 수 있고, 누군가는 스스로 집이라 것을 만들어내야만 했고. 그런데 어느 순간 행정구역 구분과 도시계획 속에서 무엇은 집이라 할 만한 것이 되고, 무엇은 무허가 판자촌이 되어버린 상황.

그렇게 누군가의 삶과 생활공동체는 쉽게 무가치한 것으로 사라지는 짧은 도시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삶 ‘마을’을 노스텔지어 이미지로 만들어서 너무 쉽게 ‘상실’로 치부하는 것은 아닌가요? 그렇게 사회가 자원의 순환과 재분배를 공정히 할 책임을 희미하게 만들고, 그저 그 역할을 개인 간의 선으로 돌리는 것이 괜찮은 것인가?

어찌보면 서울 속 ‘마을’은 임금 노동을 해야하는 일터와는 딱 구분되는 곳으로 존재하고, 마을 구성원이 공통의 취향으로 그 안에서 공동소비하고 마을인프라를 소유하고 그 안에서 공통감각을 나누는 공간으로 두고 있는데, 그런 생각으로 마을을 호명한다는 게 되게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임금노동으로 이뤄지는 물질의 분배가 아니라 사람 간의 ‘정’으로 물질을 재분배하고 공동소유하는 마을의 ‘원가치’를 이야기하면서, 마을 사업이 만든 관료주의에 저항하고 비판하면서 오히려 마을 공동체 관습으로의 회복이나 복귀를 이야기하는데, 제겐 그런 관습이라는 것도 공동구성원의 상호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권위나 질서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다보니 이것을 조금 다르게 보는게 제겐 중요했어요.

이 안에선 모두가 선한 마음으로 있고 공동행동하는 공동체로서 마을을 호명하는데, 그곳에서도 어떤 모습의 노동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어떤 위계가 있고 어떻게 그 위계들이 안보이는 것처럼 지워지고 있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마을 안에서도 권력과 위계 질서는 존재한다.  페미니즘은 그 질서를 발견하고 가시화하기에 마을 공동체에 대한 논의에서 빠질  수 없다.

또 한 가지, 되게 불편했던게 뭐였냐면 마을에서 예전에 이렇게 하면 서로 도와주고 그랬는데 사업이 되니까 그것도 마을 안에서 자체적으로 안 하게 되더라 땡땡 마을센터에서 김치 주고 하니까 우리가 이제 마을에서 김치만들기 안한다 약간 그런 내용의 것이 있었어요. 너무 불편한거에요.

저는 인간의 생존권을 구성하는 요소를 디테일하게 보고 그것을 보장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개인의 삶 구성성분을 세밀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을 구성원으로서 순환하고 공생하는 것이 마을의 가치다라고 보는 거는 제겐 폭력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국가가 사회보장권리를 안정적으로 보장하고 그것이 개인의 삶에서 당연한 값으로 유지되도록 최소 밑바닥의 선을 시민들이 같이 요구하는 게 아니라, 어떤 마을이라는 커뮤니티 안에서 서로가 더 돈독해진다는 이름으로 서로를 말한다는 게 제겐 불편했던 거죠.


신원 조금 이해가 안되는데, 요구하거나 권리로 보장받아야 하는 것들이 ‘마을'로 퉁쳐졌다는 느낌을 받았다는거죠?


이응 네. 맞아요. 분명 공동체의 도덕적인 행동으로 일컬어지는 이웃 김치 나누기 활동을 책에서 보는데 ‘내가 왜 불편해하지?’ 생각봤어요.

분명 먹을 권리의 보장은 중요한 것이죠. 지금도 곳곳의 마을 공동체에서 진행하고, 사회복지영역에서도 겨울의 중요한 이벤트로 꼭 대규모 단체 김장나눔행사를 대대적으로 하죠.

이런 김치 나누기 활동이란게 어떤 감각을 바탕으로 정기행사로 진행될 수 있었을까요. 때때론, 구성원의 생존권 보장을  고민해서라기보다는 누군가를 돕는 존재인 ‘나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 동류집단과 공통경험으로 ‘돈독함’을 쌓는 것 자체를 위해서가 아닐까요. 분명 그 안에 선의도 있겠지만, 시혜적이죠.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김치 나눔’을 검색해보았다. 우리는 마을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을 한 명의 온전한 인간으로 만나고 있을까?

커뮤니티는 그 안의 다양한 위치성이 서로 갈등하고 토론하며 조금씩 움직이는 생물 같은 것이어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고, 사회적 약자와 구분되는 ‘우리’끼리의 ‘돈독함’을 지향하는 곳엔 제가 살긴 위험하다 생각이 들었어요.


마을에서 무엇이 노동이고, 노동이지 않을까

이응 ‘돌보는 노동자 모델(프레이저 '보편적 돌봄수행자모델'을 비판적으로 고찰해봅시다 본 문단 하단의 참고자료 참조)이 떠올랐어요.

단지 근면하게 노동하는 것만이 사람의 기본값인 게 아니라 나 스스로를 비롯해서 가족이나 동료와 동네를 돌보는 것이 이 사람의 중요한 기본 성분이란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구성 성분으로서 돌봄역할을 생각하고 정책을 개발하는 것이 굉장히 필요한 시점이지 않을까해요.

그래서 돌봄이라는 걸 사적 영역으로 분리하여 정책을 설계하는게 얼마나 인간의 중요값을 배제하고 가는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과 비임금노동을 분리해서 가치를 매기고, 돌봄을 가정 내의 사적인 역할로만 고립시키고, 임금노동하는 사람은 일터에서 임금노동을 왕창하고, 돌아와 쉬는 가운데 그 쉼을 가능하도록 돌보는 역할을 다른 가족구성원(사실상 여성이 전담)이 맡는다는 것이 우리가 맞닥뜨린 한계점이지 않을까요.

새마을운동 하남시지회가 ‘우리동네 행복밥상’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동네'의 '행복밥상'은 누구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졌을까? (출처 하남시 뉴스포털)

신원 이응 얘기를 들으며 책 「모두를 위한 마을은 없다」의 한계라고 생각한 부분이 있는데요. 그동안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을 노동으로 호명하자는 급진적인 주장이 있는 반면, 마을이 회복되어야할 대상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합의가 없다고 생각해요. 회복의 대상으로서의 마을을 얘기하지 않는 분들도 있고, 책 속 대담자들의 경험치가 다른 부분도 있는 것 같고요.

이는 마을의 문제기도 하지만 노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로 확장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저는 최근 대두되는 탈노동 담론에 별 공감이 안되는데, 임금노동을 없애자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노동 자체가 소멸되어야 한다는 것인지 혹은 소멸이 될 것이라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노동이 소멸될 것이라 얘기하는 와중에도 보이지 않는 노동들이 가속화되거나 더 다양하게 범주화되는 상황이잖아요.


다음 편에서 계속


- 참고자료
함께 일하고 함께 돌보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 오마이뉴스
고용중심적 복지정책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제4장 고용중심적 복지와 돌봄노동에 대한 젠더 관점 - 한국노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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