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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룬 싱어송라이터

FEAT. 유재하, 이문세, 그리고 성시경

by 임요세프

나는 운명주의자이자, 환경 결정론자다. 지금의 내 처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나의 운명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지가 그 사람의 중요한 구성요소라고 믿는다. 사람은 그가 하는 일과, 그가 먹는 음식의 총체라고도 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음악 듣기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건 순전히, 어릴 적 시끄럽던 방앗간을 벗어나 앞집 레코드 가게에 자주 놀러 갔기 때문이다. 나의 의지와는 별 상관없는 어쩔 수 없는 행보였지만,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가게 주인이 나에게 틀어주던 음악들은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돈다. 그리고, 난 여전히 그 시절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


공교로운 건, 아버지마저 나에게 남자가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며, (술김에) 큰맘 먹고 기타를 사주셨다는 거다. 덕분에 매일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듣고,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따라 부르던 게 일상이었다. 음악이 늘 함께한 시절이었으니, 나름 낭만과 감성이 충만한 청춘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길을 걷다가도 허밍을 하고, 이어폰을 꽂은 채 CD PLAYER를 리와인드하면서 흠모하던 가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니, 희한하게도 목소리와 발성이 비슷해졌다고 느꼈다. 지금 돌이켜보면, 영락없는 모창, 딱 그 수준이었고, 청소년 특유의 과잉 감수성(허세)에 혼자 취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십 대 때는 이승철처럼 노래 부르고, 김태원처럼 기타 연주하며, 유재하처럼 곡 쓰는 음악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저 상상뿐이었다.


나름 소질이었는지, 아님, 어린 시절 환경의 영향 탓이었는지, 중학생 시절 음악 시간에, 노래 부르던 내 모습을 보고, 음악 선생님께서 혹시 음악(성악, 보컬)을 전공해 볼 생각 있느냐고 물어보셨다.


그땐, 정해진 학업 코스 외에 다른 꿈을 꾸는 걸 일탈이라 생각했다. 남들과 조금 다른 길로 들어서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선생님께 거절의 의사를 밝힌 후, 며칠 동안 계속 후회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나는 꿈, 깡, 끼의 세 가지 '쌍기역' 모두가 없는, 소심한 학생이었을 뿐이다.


간절한 꿈이 없던 나와는 달리,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음악 선생님이, 성악가라는 꿈을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음악 시간에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는 등 수업을 연습의 장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얼마 후 안정적인 교사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 성악 독창회도 열고, 방송 출연도 하며 경력을 쌓았고, 이내 지역내 유명한 음악가로 자리매김했다.


다른 선생님들이 쓸데없는 짓 하고 다닌다며 그 음악 선생님을 나무랐던, 음침한 기운이 떠오른다. 하지만, 간절함이 모든 악조건을 뚫어낸 것이다. 그때, 선생님의 나이가 40대였다.


하필이면, 지금 내가 마흔 중반을 지나고 있다. 꿈은 ‘명사’가 아닌 ‘동사’ 임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신기하게도, 예나 지금이나, 말하는 대로, 꿈은 현실이 된다. 꿈을 꾸는 한, 너무 늦은 시작이란 없음을 이제라도 알게 돼 다행이다.




시간은 흘러, 난 대학생이 되었고, 이내 1997년 IMF 경제 한파가 찾아왔다. 별 고민 없이 휴학계를 내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때마침 고3 때 담임선생님이 과외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여고생 3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내 초등학교 때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덕분에, 진짜 여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편안한 맘으로 그 친구들과 대면했다. 모두 모나지 않은, 성격 좋은, 평범한 여고생들이었다. 물론, 누가 공부를 잘했고, 누가 못했는지, 그런 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과외비가 쏠쏠해서 다행스러웠던 것, 몇 개월 수업을 진행하고 나서 마지막에 그 아이들과 노래방에 갔던 것, 그중 한 소녀 Y가 그룹 Journey의 Open Arms를 멋지게 완창 했던 기억만 선명하다.


내 눈에 Y는 그냥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문과 학생이었으니, 인문대나 상경계에 진학할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나는 제대 후 복학을 했다. 한창 졸업학점과 취업에 신경 쓰고 있을 무렵, Y가 모 대학 실용음악과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처음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진짜였다. 생뚱맞았지만, 멋있고 내심 부러웠다.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아니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나의 꿈, 끼, 깡이 떠올랐다.

Y는 피아노를 전공하고, 작사/작곡/편곡도 한다고 했다. 언제부터 그런 재능이 있었는지, 원래 꿈이 음악가였는지, 왜 고등학교 때는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는지 궁금했지만, 답을 들을 순 없었다. 나중에 얼굴 보았을 때, 신기해하던 나와는 달리, Y는 그냥, 특별한 건 없다는 듯, 시종일관 차분하고 편안한 표정이었다.


하기야, 어려서부터 유재하와 이승철을 동경하던 내겐, 그녀의 대중음악계 진출이 특별한 이벤트였지만, Y에게 피아노와 작곡은 그냥 숨쉬기처럼 자연스러운 전공과목이고, 그녀 역시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었다.

Y는 같은 과 동기 A와 B가 가수로 데뷔했다는 이야기를 전달하는데도, 전혀 흥분하거나 질투하는 기색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자신의 전공(작곡)에 자신감 있는 예술가이기에 가능한 태도였을 터다. 내 기억에 따르면, A는 박화요비, B는 거미다.




얼마의 시간이 더 흐른 2002년 여름, 우리나라에선 월드컵이 열렸고, 나는 취업을 했다.


그러는 사이 Y는 유재하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자타공인 최고의 음악 경연대회에서, 갓 스무 살 초반의 대학생이, 자신의 자작곡으로 1등을 한 거다. 그런데도 역시나, 별다른 소리 소문은 없었다.


나도,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가수 이은미가 음악프로그램에서, Y를 작곡가 겸 피아노 연주자로 초대하면서, 프로필 소개하는 걸 듣고서야 알았다. 유재하라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는, 결이 차분한 사람이었기에, 참 어울리는 수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규찬, 유희열, 김연우, 나원주, 스윗소로우, 정지찬 같은 음악가들은, 유재하 가요제를 발판 삼아 유명세와 실력을 함께 쌓았다. 하지만, 대상 수상자치고, Y의 이후 행보는 별다를 게 없었다.


가장 피해야 할 3가지 중 하나가 소년등과(少年登科)라지만, 난, Y가 이른 성공의 헛바람과 후폭풍에 휘둘릴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만, 유재하가 단 한 장의 앨범만을 유작으로 남긴 것과는 다르게, Y는 오랜 기간 롱런(long-run) 하며, 많은 이들에게 음악으로 감동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한때는 내가 더 초조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예의 모습처럼, 초조함이나 서두름 없이 본인에게 맞는 보폭으로 잘 걸어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정중동(靜中動)의 행보다.


이십 년 전, 몇 개월의 시간 동안 내가 영어, 수학 같은 과목의 지식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했을지언정, 인생 전체로 보면, Y가 내 스승 같다는 생각도 든다.



10년 동안 작사 작곡가 겸 연주자인 Y는 가수 이은미에게 곡을 주고, 함께 공연을 했다. 싱어송라이터로서 틈틈이 싱글 앨범/솔로 앨범도 내고, 피아노 연주음악도 발표했다. 이후 대학원에 진학해 피아노 작곡을 더 깊이 있게 공부했고, 재즈 공부를 하러 미국에 유학도 다녀왔다.


Y는 긴 호흡으로 인생을 바라보았고, 오랜 담금질의 시간도 가졌으니, 한층 성숙해졌으리라. 그렇게, Y는 스타보다는, 장인의 길로 가기를 결정한거다.

모르긴 몰라도, 십여 년 동안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시간을 보낸 그녀의 음악은, 아마 더 깊어졌을 거다. 실제로,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 최고의 보컬리스트 이은미도 (매스컴을 통해) 그녀를 칭찬했다. 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아도, 언더그라운드 씬(Underground scene)에서 Y는 이미 업계 고수로 정평 난 사람일지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잊고 있던 시간 동안, Y는 가수 이문세, 성시경, 이은미, 최백호, 나원주 등 우리나라 최고의 가수들에게 곡을 선사했다. 드라마 OST에도 참여했고, 이하나, 해이, 이사라 같은 동료들과도 협업했다.


그중에서 백미는 성시경과 이문세다. 십여 년 전, 내가 보는 앞에서, Y는 이문세와 성시경에게 곡을 주는 작곡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었다. 난 이로써, 말하는 대로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난생처음 목격했다.


고백하건대, 당시에는 허황된 꿈이라고 치부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온전히 내가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교 입학과 졸업, 취업, 결혼, 출산, 육아, 승진, 사업(재테크), 건강관리 같은 인생의 중요한 주제들마저 꿈과 연계해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었다. 그저 겪어야 하는 사건, 해결해야 할 숙제 정도로 치부했다. 중기/장기 계획은커녕, 단기 계획, 일주일 계획조차 세우지 않고 사는 (찌든) 직장인에게 [꿈, 미래]는 가당치도 않은, 말 그대로, 허황된 꿈에 불과했다.


반면, 십여 년 침잠(沈潛)의 시간을 보내며, 실력을 쌓아온 Y는, 자신이 공언한 대로 꿈을 이루었다. 첫 번째 꿈의 성취가 유재하 가요제였다면, 십 년 만에 두 번째 꿈에 다다른 것이다.


자신이 만든 멜로디와 가사를 성시경에게 전달하고, 성시경과 한 스튜디오에서 만나 함께 녹음작업을 하던 그 순간이 마치 꿈같았다고 한다. 정말, 극적인 순간이다. Y가 작사, 작곡하고, 국민가수 이문세가 부른 [멀리 걸어가]의 유튜브 조회수는 어느새 30만을 훌쩍 넘었다.




싱어송라이터 Y가 두 번째 꿈을 이루자, 한동안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과 나의 꿈이 떠올랐다. 막연했던 나의 첫 번째 꿈, 이승철처럼 노래 부르는 사람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흠모하던 이승철이 조용필과 김현식을 존경했고, 그들은 모두 유재하를 아꼈다는 점, 그리고 유재하는 공식적으로 Y를 인정했고, Y는 나와 오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는 데 생각이 이르자,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웠다. 차분하게 이 순환 관계를 들여다보니, 끼와 깡이 좀 더 있었더라면, 꿈에 조금 더 다가갈 수도 있었으리라는 아쉬움도 든다.


Y가 이룬 꿈 이야기는 분명 나에게도 좋은 자극제가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경우도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 꿈들이 많다. 내가 간절히 원하던 배우자, 자녀의 모습은 꿈꾸던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서울 자가주택 마련, 박사 학위 취득, 20년 장기근속도 모두 이루어졌다.


아직,킷리스트의 상단을 차지하는 몇 가지 목표가 남아있다. 책 출간하기, 싱글 앨범 내기 및 작사 저작권 등록하기, 10억 원 이상 모아서 건물주 되기, 돌우물 성장 또는 상장하기 등이 그것이다.


혼자만 보다가, 브런치에 적어놓고 보니 민망하기도 하다. 하지만, 주변에 알려 스스로 자극도 받고, 긴장감도 가져야 생생하게 꿈꿀 수 있지 않겠는가.


단기 프로젝트부터 중장기 프로젝트까지 포트폴리오는 다양하다. 말보다는 행동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다. 이제, 막연한 생각과 상상의 시간은 끝을 내야 한다. 나의 운명을 사랑하되, 주변 환경을 스스로 조성할 줄 아는, 적극적 의미의 환경 결정론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종이책 출간은 조금 늦어지더라도, 브런치 북은 때마다 발간하고, 파주지역 출판사에 먼저 찾아가 억지춘향 통사정이라도 할 수 있을 거다. 또한, 정식 앨범은 아니더라도, 먼저 Y의 녹음실에 찾아가, 기념 CD 녹음을 위한 피아노 연주를 부탁하거나, Y의 앨범에 실을 노랫말을 퇴고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작년에 샀던 바이오 주식이 내년에 급등해 순식간에 스타벅스 건물을 보러 다닐 수도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돌우물의 프리미엄 커피 브랜드 파라노이드(PARANOID) 잠실점을 인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거 같다.

그렇게, 요세프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야생화

- 유해인 (1981~ )


낯선 숲에 어디까지 왔는지

잠이 들어 가볍게 안겼을 때

바람을 타고 떠난다

어디라도 날아가 긴 꿈을 꾼다


아침이 오면 긴 밤이 지나면

기다림 속에 지쳐 하얗게 피어난 꽃

손을 뻗으면 그 길을 따라서

어디라도 날아가 긴 꿈을 꾼다


아침이 오면 긴 밤이 지나면

기다림 속에 지쳐 하얗게 피어난 꽃

손을 뻗으면 그 길을 따라서

아침 이슬을 품고 피어 살아있는


새벽이 오면, 어둠이 지나면

기다림 속에 지쳐 하얗게 피어난 꽃

손을 뻗으면 좁은 길에 아침이슬을 품고 피어

살아있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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