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ol head and warm heart.
- Alfred Marshall (1842~1924)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 내 인생의 좌우명이다. 아니, 좌우명이라기보다는 지향점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이 명언은, 단지, 지성과 감성을 모두 갖춘 멋진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개인적, 미시적 수준의 목표에 그치지 않는다. 냉철한 머리로 사회 현상을 분석하되, 일반인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학문을 활용해야 한다는 집단적, 거시적 의지이기도 하다.
서양에서는 케임브리지 대학 경제학과 교수, 우리의 역사 속에서는 다산 정약용 선생 정도 되는 위인들이 주장한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이 깃든 문장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니, 애당초 나 같은 범인이 좌우명으로 삼기에는 너무 크다. 멋 부리려고 함부로 즐겨 쓸 용어는 아닌 듯하다.
고백하건대, 차가워야 할 때 뜨겁고, 뜨거워야 할 때 차가웠던 적이 많았다. 그저 한마디 따뜻한 위로와 공감이 필요한 상대방에게, 현실적 조언이랍시고 무겁고 차가운 언어를 내뱉은 후 스스로 뿌듯해했다. 때로는, 냉정한 현실 속 더 나은 선택지를 고민하는 상대방에게, 자책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세상 탓을 했다. 참아야 할 때 화내고, 정작 화내야 할 때는 참았다.
삶은 모순(矛盾)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이리저리 헤매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지만, 업무의 영역에서까지 갈지(之) 자 행보를 하는 건 위험하다. 더구나, 금융, 그중에서도 기업금융 업무를 밥벌이 수단으로 삼고 있는 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3년 만에 인사발령이 나서, 얼마 전부터 서울시청 근처에서 근무 중이다. 서울 근무도 10년 만이고, 그중에서도 대기업, 금융회사, 법률회사, 외국계 기업, 각종 관공서 본사가 즐비한 구도심 한복판에서 일하게 되다니, 한편으로는 당황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대도 된다. 이곳은, 주로 가족들과 남산, 덕수궁, 광화문 등의 코스로 다니던 여행길이었는데, 새삼스럽다.
점심시간 덕수궁 돌담길, 정동길을 산책하는 동안 많은 직장인들과 마주친다. 유독, 그들이 입고 있는 정장 왼편에 달린, 익숙한 회사(대기업) 배지(마크)가 눈에 들어온다. 난 이곳 사람들을 정장, 커피, 그리고 당당한 걸음걸이, 세 가지 키워드로 정의했다. 냉철한 현실분석에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꽤 큰 거리감을 느낀다.
내가 매일 만나고, 부딪히며, 때로는 실랑이를 벌여야 할 고객들은 이들과 다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20년 동안 중소기업 현장을 다녔다. 넓은 대로, 높은 빌딩보다는, 내비게이션을 켜도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 힘든 구불구불한 길, 언덕에 위치한 회사들이 많았다.
이곳은 화려한 서울의 빌딩 숲이지만, 불과 10여 분만 차를 타고 나가면, 또 다른 세상, 나에게 익숙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역시, 서울 한복판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출장을 나와 중소기업 대표자, 종업원분들과 미팅을 하노라면, 바로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익숙함이 주는 안도감과 에너지는 크다.
출장길에 충무로 인쇄 거리를 찾았다. 수십 년 전 충무로가 영화의 본거지였을 때 영화 홍보 포스터, 전단지를 인쇄하는 인쇄소들이 자리 잡으면서, 이곳은 우리나라 인쇄산업의 중심가가 되었다. 충무로는 더 이상 영화산업의 메카가 아니지만(물론, 상징성은 여전하다), 필동은 여전히 오래된 인쇄소들이 성업 중이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 인쇄소의 외관은 많이 변했다. 신축건물, 재건축 건물도 많아졌다. 전통과 현대가 한데 어우러져 동네(마을)로서도 가치가 높아졌고, 여행객들도 붐빈다. 서울 한 복판에 인쇄소 마을이라니.
다만, 인쇄소 안에서 기계를 만지고, 인쇄물을 나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장년층이거나 외국인들이다. 좋게 말하면, 한 분야의 장인들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고인 물이다. 혁신이 더디면, 아무래도 산업으로서의 경쟁력은 떨어진다. 힘들고, 고된 일이라는 인식도 여전하다. 교통(접근성)과 건물 외벽(근무조건)은 개선되고 있으나, 젊은이들은 여전히 외면하는 삶의 현장이다.
역시나, 이 회사도 직원을 채용한 후, 수습 기간을 거쳐 이제 좀 쓸 만하다 싶으면 힘들다고 그만두거나, 다른 곳으로 이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추가로 직원을 고용하셔야 더 많은 자금을 지원하고, 가점을 드릴 수 있다고 말해도, 회사 대표님에게는 그저 탁상공론일 뿐이다. 이 회사에는 대표님, 사모님, 아들, 딸이 모두 근무한다. 중소기업이 가족기업이 되는 건 어쩌면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른다.
혹자는, 자기들끼리 다 해 먹는다고 욕을 하기도 하지만, 고객의 주문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고, 신규 거래처 영업을 하고, 새로운 디자인으로 인쇄물을 제조하려면, 팀워크와 협업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처음엔 울며 겨자 먹기로 아들, 딸, 배우자의 도움을 받았다 해도, 사람 구하는 게 힘들고, 인력 활용이 쉽지 않아 가족기업으로 운영하는 게 차라리 더 낫다는 사장님의 푸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25년 이상 경력을 보유한 베테랑 대표이사이지만, 달리 보면, 후계자 양성, 경영권 승계 준비에 미비한 거다. 출판물 인쇄업, 제책업, 패키지(컵/폴더/포장지) 인쇄업은 비교적 수요가 꾸준한 편이지만, 제품의 부가가치가 낮다. 인쇄소들이 한데 모여 있기는 하지만, 업체 간 협업이나 공동프로젝트가 활성화된 게 아니어서 집적 효과도 적다.
규모도 영세해 외부 충격에 취약하고, 옵셋 인쇄기나 프린터기 등 기계장치도 감가상각이 많이 돼 생산 효율성도 떨어진다. 인쇄기, 프린터기, 절단기, 가공기, 프레스기, 지게차 등 기투입된 매몰비용이 커서 쉽사리 인수자를 찾기도 어렵다. 정부 차원에서 제조업을 우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중후 장대한 장치산업(제조업)은 투자 비용이 크기 때문에, 잘못하면 회복 불능의 손실을 볼 수도 있다. 고민이 깊어지는 지점이다.
찾아보니 신생 업체들 중에서 3D 프린팅, CAD/CAM 프로그램 활용 능력이 좋고, 고객 맞춤형 제품인쇄가 가능한 경쟁업체들도 많다. 사장님의 생각과 달리, 출판인쇄업은 더 이상 전통 산업이 아니다. 3D 엔지니어링, IT, AI, Meta-verse, 문화 콘텐츠와 접목되어 신성장 동력산업, 디지털 뉴딜 산업, 문화정책산업으로 변모 중이다.
작년 동기 대비 매출액도 다소 줄어드는 중이다. 경기침체의 여파로 주요 거래처의 수주가 줄었기 때문이다. 신규 거래처를 확보해야 하는데, 영업력과 네트워크가 한계가 있으니, 힘에 겨운 모양새다.
이처럼, 중소기업의 현장은 1년 앞, 6개월 앞의 상황도 예측하기 힘들다. 사장님은 당장 다음 달 직원월급, 법인세, 부가가치세, 4대 보험료, 임차료, 은행이자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난다고 하셨다. 그 얘기를 듣는 동안 내 머리도 지끈거렸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러한 시대변화, 산업변화, 4차 산업혁명의 물줄기를 잘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씀을 전해드리려다가 참았다. 그렇게 말하려던 나도, 시대의 흐름을 버거워하며 헤매는 중이고, 내 한 몸 간수 하기도 어렵다. 과연, 누가 누구를 심사하고, 평가한다는 것인지 헷갈렸다.
60대에 접어든 장년의 경영자에게, 계속기업으로 존속하기 위한 회사의 중장기 계획과 경쟁력 제고 방안을 묻고, 시스템에 의한 업무처리를 요청하는 건 코미디고, 난센스다. 그가 살아 움직이는 기업의 역사요, 총체이기 때문이다. 출력해 온 산업분석보고서를 보고, 몇 가지 사항을 핀포인트로 알려드리려다가, 이내 접었다. 그 대신, 실력 있고 젊은 인재는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대표님과 사모님의 월급을 줄여서라도, 반드시 채용하면 좋겠다는 부탁의 말씀만 드렸다.
“인사가 만사다, 사람이 전부다” 같은 인본주의적 메시지가 훨씬 더 현실적이고, 남녀노소 누구나 이해하기 쉬우며, 받아들이기에도 거부감이 없기 때문이다. 사장님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무리 어려워도 사람에 대한 투자는 아끼지 않겠다며. 이 정도면 오늘의 미션은 성공이다.
한 기업의 신용등급은 최근 3개년의 실적을 토대로, 미래 실적을 예측해 산출된다. 기업의 미래가치 산출법 역시 대동소이하다. 사업 초창기, 그가 1997년 IMF 외환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고려되지 않는다. 고만고만한 경쟁업체들과 달리,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을 어떻게 고객으로 확보해 지금껏 거래 중인지, 그 치열한 영업 노하우도 정확히 평가되기 어렵다.
부동산 등기부등본에 남아있는 거래처들과의 소송, 분쟁의 흔적(가압류 등기, 말소 내역), 품질 불량이라는 핑계로 한 푼도 정산받지 못한 장기미수채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거래처 등 숱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20년 이상 살아남았다. 중소 제조업체가 20년 이상을 생존했다는 것은 사실상 기적이다.
하지만, 여러 번의 데스밸리를 꿋꿋하게 이겨낸, 거짓말 같은 이 기업의 역사는 최근 3년간 대차대조표나 손익계산서에 계상되지 않는다. 기업가치 평가금액에도 반영될 리 만무하다. 오히려, 매출감소세, 이익 감소, 판매관리비의 증가 등으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을 게 뻔하다.
그래서, 오늘도 난, 차가운 머리보다는 뜨거운 가슴 위주로 업무에 임하는 우를 범하고야 말았다. 이 회사는 이런저런 장점으로 인해 앞으로도 지속 성장할 것이라는 객관적 기술 대신, 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오랜 경력/경험을 토대로, 작금의 경영난을 극복해 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담았다.
그리고, 오랜 기간 직원 고용과 세금 납부, 수출로 국가 경제의 성장과 부가가치의 향상에 역할을 한 기업이 일시적 유동성 위기를 겪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에 부합한다는 주관적 심정을 쏟아냈다.
본래, 기업금융 심사서는 차갑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가끔은 냉정과 열정 간 배합이 원활하지 않을 때가 있다. 마치, 참아야 하는데, 화를 내던 내 모습처럼.
그래도, 이내 냉정을 되찾아 회사와 동종업계의 현실을 비교적 정확하게 드러냈다. 갈지자걸음에도 지켜야 할 선은 있다. 객관적인 상황 판단하에, 실사구시에 주안점을 둔 결론을 내렸다.
다행히, 내 의견이 수용되어 그 인쇄소의 자금유동성은 해소될 수 있게 되었다. 오직, 정량적인 평가, 기계적인 심사만 했다면, 부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행간의 의미를 읽고, 이해하며, 공감하는 능력이 있다. 아직, 컴퓨터나 인공지능이 범접하지 못하는 정성평가의 영역이 있기에 감정노동자인 우리가 월급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거다.
다시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생각한다. 시금석 같은 표어지만, 도달하기 힘든 목표임이 틀림없다. 이는, 냉정한 평가자인 줄로만 알았던 내 동료와 선배도, 나와 같은 의사결정을 했다는 점에서 재차 확인된다.
삶은 모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