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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 연기를 하며 살아야 한다.

감정노동의 위기

by 임요세프

지금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 온 지 7년이 되었다. 모래내 시장 주변 오래된 상가, 가게들은 모두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30층이 넘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숨이 헐떡거릴 정도로 가파르던 거북로는 낮은 경사의 도로로 재포장되어 수천 세대가 넘는 거대한 아파트촌으로 거듭났다.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다. 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되어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유입되고, 기존의 저소득층 원주민을 대체한다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하지만, 처음 이 동네에 이사 왔을 때의 어수선한 분위기, 번잡하고 어지럽던 골목길의 정취가 그립기도 하다. 세상사 뽕나무밭은 푸른 바다로 변하기 마련이지만(桑田碧海), 과거를 경험한 마음속 향수(nostalgia)는 영원하다.


그래서 나는, 7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동네 커피숍을 매주 찾고 있다. 그동안 매장의 주인과 상호는 여러 번 바뀌었지만, 손님인 나는 바뀌지 않았다. 그곳에서 몇 편의 논문과 박사 학위 논문까지 완성했으니, 내겐 소중한 향수의 공간이다. 커피값이 오르고, 소금빵 맛이 다소 변했어도, 원주민(?)인 내가 그 공간을 떠날 이유는 없었다. 얼마 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날 아침에도 난 여느 주말처럼 그 커피숍을 찾았다. 커피 한 잔과 빵 두 조각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십여 분의 시간이 지났고, 집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족들에게 주려고 미리 사놓은 얼리버드* 빵을 들고 말이다.

* (전날 팔리지 않은 빵 묶음을 아침 일찍 방문하는 손님에게 5천 원에 판매하는 이 매장의 멋진 전략이다. 내가 이 집의 단골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잠깐새 새로 내놓은 얼리버드 중에 내가 좋아하는 스콘과 연유 바게트가 섞인 빵 묶음이 눈에 들어왔다. 속으로 ‘오늘 내가 일찍 나는 새가 되다 보니, 맘에 드는 얼리버드를 선택할 기회가 생겼군’ 하면서, 호기롭게 카운터로 향했다. 그리고, 얼리버드 간 교체를 요청했다.


“제가 좋아하는 빵이 들어 있어서 그러는데, 저 얼리버드로 바꿔주면 안 될까요?” 의문문이긴 하지만, 확신에 찬 요청문이었다.

“안 됩니다. 이미 계산이 끝난 얼리버드는 교환도 환불도 안 돼요”

“네?..... 저 단골인데...”

“이미 계산한 지도 한참 됐고, 얼리버드를 교환해 달라고 하면 안 돼요”

“저 들어온 지 10분밖에 안 지났고, 교환요청도 처음이고, 환불해 달라는 것도 아니에요. 제가 첫 손님이라 아직 얼리버드 빵을 사러 온 손님도 안 계시니....”

“얼리버드는 교환 안 된다니까요. 그게 원칙이고, 공지되어 있어요.”

“아니.... 어디에 공지가....??”

“공지문을 붙여 놓았다는 게 아니라, 그걸 원칙으로 하고 있고, 교환/환불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안내를 한다고요”

“환불도 안된다고요?”

“네, 아저씨(!), 지금 이거 영업방해고, 나가시지 않으면, 경찰 부를 거예요!”“사람 잘못 건드렸어요”


결국, 경찰관 두 명이 왔다.

“저 사람이 가지도 않고, 영업방해하고 있어요. 환불해 준다고 해도, 안 가고 저러고 있어요”

“아까는 환불 안 된다면서요”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요. 교환이 안된다고 했지”

“분명 그렇게 들었는데요??” (이젠 내 목소리의 데시벨도 크게 상승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경찰의 중재로, 5천 원(!)을 환불받았고, 그렇게 소동은 마무리되었다. 단, 그 와중에도 갓 구운 연유 바게트와 스콘은 도저히 환불할 수 없었다. 짧은 순간에도, 이 가게에 더 이상 오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커피숍을 오가며 인사도 나누었기에 내 딴에는 사장님과 안면을 텄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나 보다. 보통은 고객이 가게주인에게 ‘갑질’을 하거나, 진상짓을 하는 게 일반적인데, 지금 생각해 봐도 내가 ‘을질’을 당한 것 같다. 그날 난 ‘손님’이 아닌 ‘손놈’이었고, 커피숍 사장님은 일상적 표면 연기가 아닌, 혼신의 내면 연기로 내 혼을 쏙 빼놓았다.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일반적으로, 커피숍 사장님이나 바리스타, 아르바이트생은 모두 감정노동자라고 할 수 있다. 감정노동은 자신의 실제 감정을 숨기고, 자신이 속한 조직의 입장에 따라 말투나 표정 등을 연기하며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인간관계에서도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해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을 조절해 표현하는 것은 기본 매너이기도 하다. 단, 감정노동은 업무매뉴얼로 정해진 표면 연기가 노동자의 업무성과나 조직성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부자연스럽고, 일방적이다.


감정노동의 개념을 처음 도입한 것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사회학과 교수인 앨리 러셀 혹실드다. 그녀는 1983년 자신의 저서 “The Managed Heart”에서 델타 항공의 여성 승무원 사례를 통해 감정노동의 개념과 사례를 일반화시켰다. 여성 노동과 사회문제 연구의 권위자답게, 여성의 감정이 상품화되고, 이용되는 문제를 이슈화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사실 책 제목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조절된 감정”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아무래도 항공업계 승무원들의 (스마일) 서비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경영성과와 연결된 후속 연구들이 계속되고, 자연스럽게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이라는 정제된 용어로 재해석된 것 같다. 문장의 원래 뜻과는 관계없이 The Managed Heart은 감정노동으로 읽으면 되고, 감정노동 연구 하면, 혹실드 교수를 떠올리면 된다.


(참고)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원 제목은 “Dead Poets Society”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제목으로 이미 30년 이상 쓰이고 있으나, 사실 잘못된 해석이라고 보는 게 맞다. 원작 속 Dead Poets Society는 고전 문학과 시, 자작시를 지어 낭송하던 학생들의 모임명이다. 문맥상 “고전 문학(시) 연구회(동호회)”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 영화를 처음 한국어로 번역한 사람의 해석이 어느새 고유명사처럼 굳어버렸다. 귤이 강을 건너면 탱자가 되듯이, 때로는 상식과 정답이 교묘하게 뒤틀린다. 자신의 메타포(은유)를 투영하고 싶다면, 한 분야의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




흔히 감정노동자는 갑이 아닌 을로 표현된다. 그러나, 시시각각 갑은 을이 되고, 을은 갑이 된다. 그게 현실 세계다. 나 역시 그러하다. 우리 회사에도 CS(고객만족) 담당 부서가 있고, 잘 정리된 CS 매뉴얼이 있다. 6개월마다 고객들이 평가한 만족도 점수가 공개되고, 이 점수는 내가 속한 조직의 KPI(핵심성과지표)에 반영된다. 고객인 척 전화를 거는 모니터 요원에 의해 내 말투, 응대 태도, 전화벨이 울리는 횟수까지 점수화되고, 평가받는다. 점수가 평균에서 멀어지면, 별도로 CS 교육을 받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기분 안 좋은 일이 생겨도, 사무실에서 전화벨이 울리면, “감사합니다~”로 시작되는 낯간지러운 멘트를 날려야 한다. 다시 생각해 보니, “사랑합니다, 고객님”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신입사원 시절, 명문대 출신이니, 신의 직장이니, 엘리트 집단이니 하면서 한때나마 우쭐대던 나의 어깨가 한없이 축 처진 지는 이미 오래다. 1980년대 항공 승무원으로 대표되던 감정노동자의 자리는, 2020년 현시점 은행원(금융회사 직원)의 그것으로 대체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산업안전보건법의 개정으로 은행원(금융기관 임직원)은 법률에서 정하는 감정노동자의 지위에 올랐다. 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영락없는 감정노동자다.


전화기 너머의 폭언이 일상화된 지 오래다. 직원 면전에서 쌍욕을 내뱉던 채무관계자, 사무실에 갑자기 찾아와 소화기 분말 가루를 뿌리던 고객, 전화 녹취를 핑계로 협박하던 민원인, 표정과 말투가 기분 나쁘다며 회사 홈페이지와 상위기관에 한풀이식 민원을 넣는 고객들도 다반사다. 전화 상담원들이 상대방 감정의 쓰레기통 역할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동안의 경험으로 치자면, 나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금융서비스업 종사자, 지식산업 종사자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스스로를 속인 채 감정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커피숍 사장님 같은 혼신의 내면 연기, 겉과 속이 혼연일치된 메서드 연기(Method acting)는 금물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두 개의 자아 중 선한 부분만을 드러내, 표면 연기를 해야 한다.




초창기에는 감정노동이 조직의 경영성과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감정노동이 직무소진(번아웃), 결근, 퇴직, 무단이탈 등 근로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조직성과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연구물이 많아졌다. 더구나, 서비스 직군에 해당하는 일자리가 크게 늘어, 이제는 감정노동자가 승무원, 텔레마케터, 가게 점원, 백화점 직원, 은행원에 그치지 않는다.


조금만 범위를 넓혀보면, 연예인, 간호사, 교사, 공무원(대민업무, 사회복지업무), 의사, 변호사, 판사, 정치인 등등 고객(상대방)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공감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해결책까지 제시해야 하는 고난도의 감정노동자 수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아마, 자신은 감정노동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감정노동으로 상처받지만, 때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바야흐로, 감정노동의 위기다. 다행히, 2018년 10월부터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시행됐다. 정확히는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된 것이다. 개정법률에 따라, 감정노동자는 고객에게 폭언의 금지를 요청하거나, 문구를 게시할 수 있고, 회사에도 업무의 중단, 담당자 교체, 휴식 등을 요청할 수 있으며, 심한 경우 고소 고발 및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도 보장된다.


난감한 경우도 많다. 검사, 경찰(형사), 교도관, 군대 교관, 채권추심원, 38 세금 기동대처럼 성과를 내기 위해서 권위감, 위화감 조성이 필요한 감정노동자들이 그 예다. 사회가 투명해지고, 법률이 고도화될수록, 일방적인 위력은 힘을 잃고, 전문성과 감수성, 소통역량이 힘을 발휘한다.


“고객의 앞에 있는 직원도 누군가의 소중한 자녀이거나, 부모입니다.” 너무나도 상식적인 이 캐치프레이즈가 객장에 붙여지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표면 연기, 감정노동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 타인과 관계를 단절하고 살기도 어려울뿐더러, 자칫 우리의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감정노동의 힘겨움은 근로소득의 가치로 보상받기 마련인데, 어느새 챗봇, 키오스크, 로봇이 그 자리를 빠른 속도로 대체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 단순반복적인 업무를 오차 없이 정교하게 수행하는 산업용 로봇이 공장 노동자의 일자리를 대체한 지는 이미 오래다. 이제는 공장경비나 아파트, 사무실 경비를 로봇이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확인된다. 최근 SBS 뉴스 중 1시간에 300인분의 음식을 요리하는 로봇이 나와 눈길을 끈다. 그 로봇의 월 대여료가 100만 원 수준이라고 하니, 최저 인건비 월 200만 원보다 저렴하다. 업무의 효율성과 생산성 면에서, 사람이 로봇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받아들여야 한다.


로봇은 주방에서 음식만 만드는 게 아니다. 홀서빙, 설거지에 특화된 로봇도 있고, 커피숍에는 바리스타 로봇도 생겼다. 키오스크로 주문하고, 바리스타 로봇이 커피를 내리면, 더 이상 사람 점원은 필요 없다.


전 세계 푸드테크(Food-tech) 시장의 규모는 400조 원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먹거리(푸드) 시장 일자리 규모도 총 1,000만 개나 된다. 그러나, 이제 직원(사람)을 고용하지 않는 1인 창업 매장, 음식점 수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로봇은 업무 효율성과 생산성, 정교함으로 승부를 볼 것이고, 가게(공장) 사장은 더 이상 직원의 기분이나 표정, 근태, 감정노동 따위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인간의 영역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서비스업의 일자리가 기계에 대체되고 있다. 그것도, 빠른 속도로.




이제, 더 이상 상대방의 몰상식한 태도나 말투, 행동거지에 일희일비할 일이 아니다. 로봇에게 대체되기 힘든 품격, 교양, 교감 능력을 키워야 한다. 다행히, 아직 고객 또는 파트너의 기분이나 현장의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해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창출한 로봇은 발명되지 않았다. 인공지능이 빠른 속도로 감정의 영역까지 침범(?)하고 있다고는 하나, 사람만이 갖는 특유의 직관력과 소통력, 신뢰, 우정, 애정 같은 감정을 온전히 습득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몰상식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되, 품위와 교양으로 드러나는 표면 연기를 지속하는 것만이 우리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 C(Choice)”의 연속이라고 일갈했다. 여기서 B와 D는 수정 불가한 디폴트 값인데, C는 쓰는 이의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다. Complement(실행, 실천) 또는 Communication(소통)으로도 바꿀 수 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 교감하고 소통한다는 점에서 이런 쓰임새는 적절해 보인다.


물론, 사람도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을 할 때 비용과 보상을 따진다. “사회적 교환이론”은 사람이 비용과 보상이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서 사회적 행동을 한다는 이론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호혜성, 등가성의 원리가 인간의 행동 원리에 적용된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교환의 대상은 물질적인 데 그치지 않고, 인간관계, 신뢰, 우정, 애정 같은 심리적, 질적인 부분으로도 이어진다. 산업용 로봇을 활용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할 수는 있으나, 사람은 그 외에도 다른 사람들과 소통, 교감 같은 사회적 교환을 해야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요, 대체 불가한 핵심경쟁력이다.


전 세계가 앞다투어 육성하는 “메타버스”(가상 세계) 산업 역시, 실은 가상의 3D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만들고, 사회/경제/문화 활동을 하고, 그 속에서 가치를 창출하며,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데 의미가 있다.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 VR/AR 같은 기술력 역시 결국엔 타인과의 소통, 관계 맺음, 교감을 예전보다 더 잘하기 위한 인간성 되찾기 프로젝트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 속 현장성, 순간성, 예측 불가능성, 그리고 (사람 간) 갈등과 상처는 가상공간에서 얼마든지 극복 가능하다. 메타버스 안에서는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슈퍼맨이나 배트맨 같은 영웅이 될 수도, 반대로 조커나 투페이스 같은 악마가 될 수도 있다. 언제 어디서든 내 꿈과 상상을 실현할 수 있다. 가상 세계는, 결국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세계다. 본래, 꿈은 달콤하고, 현실은 쓰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해졌다.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수도, 가상 세계에서 파묻혀 현실을 외면하며 살 수도 없다. 리얼한 시공간에서, 누군가와 부대끼고, 일하며 살아야 한다. 오직, 어제보다 더 나은 (표면) 연기를 하는, 수준 높은 감정노동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빛이 나는 존재라는 점이다. 커피숍에서 더 이상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게 참 다행스럽다. 찝찝하면, 꼭 탈이 나고,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기 마련이다. 화를 다스리며 살아야 한다. 앞으로는 혼신의 내면 연기는 접어두고, 표정 변화를 최소화하는 표면 연기에 집중하며 살아야겠다.


오늘 아침에도 그 집 빵과 커피가 생각이 나, 고민 끝에 배달의 민족 앱을 열었다(방문하기는 민망하니까). 바게트를 주문하기 전 손님들이 쓴 리뷰를 훑어보았다. 빵 맛을 칭찬하는 글보다는, 사장님의 불친절함을 호소하는 글들이 더 많다. 역시, 사람 눈은 비슷한가 보다. 그날 내가 을질을 당한 게 맞는 것 같다. 다행이었다. 나는 어느 정도 표면 연기에 성공했고, 사장님은 내면 연기를 펼친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키오스크 주문대와 로봇 바리스타, 빵 굽는 로봇으로 대체된 카페를 방문할 생각이 없다.머지않은 시일에 카페의 문을 쭈뼛쭈뼛 열고 들어가, 머쓱한 미소를 짓고, 머리를 긁적이는 표면 연기로 그 사장님을 마주할 생각이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수준의 대우를 받을 수는 없겠으나, 가게의 주인이나 아르바이트생이 커피를 전해주며 건네는 한마디, “뜨거우니 조심히 드세요”, “맛있게 드세요” 정도면 족하다.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만이 관계를 회복시킨다. 사람은 오류의 생명체고, 실수로부터 지혜를 얻는다. 우리는 그렇게, 감정노동을 하며 성숙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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