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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만 마세요(Feat. 신해철)

같은 시간 속 그대에게

by 임요세프

“아프지만 마세요”

- 신해철 (1968~2014)



실제 하루하루 보내는 일상은 무미건조하고, 높은 확률로 쓰다. 쓴맛의 아메리카노는 현실과 닮아있다. 잠시나마 다른 일상을 경험하고 싶어서인지, 나는 달콤함과 거품으로 포장된 카페라테를 마신다.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동료들, 후배들 상당수가 솔직하고 심플한 풍미의 아메리카노를 즐기는 거 같아 부럽기도 하다. 건강을 챙겨야 한다는 신념으로, 날마다 약 챙겨 먹고, 걷고, 식사량 조절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설탕과 시럽의 유혹에는 쉽게 넘어가는 모습에, 삶의 모순을 직시하게 된다.


고백하자면, 그간의 나를 채우고 있던 내면의 팔 할은 부정적이었다. 타고난 기질과 성향의 영향도 있을 테고, 자라온 환경, 직간접 경험도 한몫 차지할 것이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로부터 덕담을 듣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는 건 생각보다 중요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불안함, 초조함, 열등감, 시기심, 반항심, 외로움 등의 부정적 감정이 유년기, 청년기의 나를 감싸고 있었다. 잦은 이사와 전학, 그로 인한 동급생들의 무시, 괴롭힘이 어린 시절 내 영혼에 상처를 남겼고, 무엇보다 사랑받고 자라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에 힘겨웠다. 그러면서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버지의 형제분들과는 다르게, 쫓기듯 인생을 살아가는 부모님을 지켜보면서, 반전을 위해서는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만은 잊지 않았다.


그러니, 공부 잘하는 반장은 될 수 있어도, 소위 말하는, 인성 좋고 마음씨 넉넉한 리더는 될 수 없었던 거다. 지금도,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은 나를 까칠한 놈, 공부만 잘했던 이기적인 반장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내 인생이요 운명이다. 시간은 흘렀고, 마흔이 넘어서부터,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통설을 깨고자 노력 중이라며 스스로 자위해 본다.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든 간에, 과거에 얽매여 있을 순 없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되(Carpe Diem), 어떤 결과든 (운명으로) 받아들이며(Amor Fati), 언제 다가올지 모를 죽음의 순간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Memento Mori).


“운(運)은 생각보다 강한 오브젝트(Object)이다. 그리하여, 인생의 가장 깊숙한 비밀을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성공은 운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나와 비슷한 시간을 살다 떠나간, 故 신해철의 말이다. 같은 시간대를 걷고 있기는 하나, 그가 남긴 삶의 흔적이나 거품은 너무나 진한 것이어서, 감히 나이가 같다는 이유 하나로 그와 비교하는 건 실례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 그가 청년들에게 남긴 이 메시지에 나는 ‘철저히’ 동의한다.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고, 고마우며, 안도감이 든다. 그의 메시지는 진실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승철은 동네 형 김태원을 따라다니다가 부활의 보컬이 되었고, 그들을 흠모하며 따라다니던 또 다른 후배 신해철은, 밴드 무한궤도의 보컬이 되어 대학가요제의 위너가 되었다. 미소년‘신해철’도 (이승철처럼) 겨우 스무 살에 가장 빛나는 별이 되었다. 얼마 전, 우연히 유튜브에서 1988년 대학가요제에서, 영원한 청춘의 노래 ‘그대에게’를 연주하던 그의 모습을 보았다. 영락없는 스타의 탄생이었다. 4분의 시간 내내 아우라가 빛을 발한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날의 심사위원장마저 가왕 조용필이다. 그가 스타가 되는 건 ‘운명’이었다.



그는 탁월한 가수 겸 연주자 겸 작곡가 겸 작사가 겸 프로듀서 겸 철학자 겸 논객 겸 사회운동가였다. 타고난 재능이 특출 나고, 그 재능을 세상에 드러내야만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는 비범한 예술가였다. 무한궤도라는 작명부터 예사롭지 않다. 해철이라는 이름의 첫 글자 해(海)는 바다, 끝이 없는 무한(無限)을 뜻하고, 두 번째 글자 철(鐵)은 단단한 길, 궤도(軌道)를 의미한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름 ‘해철’은 ‘무한궤도’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015B’라는 이름으로도 변주된다(01은 무한을 뜻하는 두 개의 숫자고, 5B는 Orbit, 즉 궤도라는 영어 단어를 숫자(5)와 알파벳 대문자(B)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른 성공은 독이라 했던가. 그는, 100년이 지난 후에도 인구에 회자되고, 청춘들에게 불릴 ‘그대에게’만 만든 건 아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대학가요제 대상, 솔로 앨범 히트, 그룹 넥스트의 성공, 후배 양성 등으로 다양한 음악적 성취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언제나 이슈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남들이 용기가 나지 않아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공개적으로, 자청해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랫말을 통해 동성동본자들의 금혼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냈고(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해), 간통죄 폐지를 주장했으며, 대마초의 비범죄화가 필요하다고도 역설했다. 100분 토론의 단골 논객으로 출연해 학생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며 분노를 표출하고, 국회를 유해매체로 지정하자는 주장도 했다. 공교육은 머지않아 폐지될 것이라 예언함과 동시에 프랜차이즈 학원 광고에 출연하는 패기도 보여줬다. 심지어 북한의 미사일 실험 성공에 축하의 메시지를 남기기까지 했다.


민감한 이슈에 대한 강한 목소리와 주장은 저항에 부딪히고, 안티를 낳는다. 그가 이런 점들을 몰랐을 리 만무하다. 시간이 흘러, 스스로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거나, 생각이 바뀌었음을 고백한 적도 있다. 너무 많은 말들을 내뱉으면, 독이 되어 돌아온다. 그도 한낱 부족한 인간이고, 겨우 마흔을 산 동시대의 시민이었을 뿐이다. 이런 그의 인생에 행(幸)과 불행(不幸)이 늘 교차편집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순간순간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다. 겸손한 척, 넉넉한 척하지 않았다. 겸손은 미덕이지만, 겸손하지 않다고 욕먹을 일은 아니라고 일갈했다. 자기 색깔을 과감히 드러내며, 어디서든 자신의 흔적을 남기며 살았다. 욕먹을 걸 알면서도, 실수를 반복해 두려움과 후회의 감정을 수시로 느끼면서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유명 스피커로써 제 몫을 충실히 수행했다. 마치, 로운 시대를 주창하는 혁명가처럼.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마지막 강연에서 세상을 향해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태어난 게 목적이다. 그걸로 목적을 다한 거다. 그게 소명이고, 우리의 삶은 보너스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그는 이런 목소리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 이 시대 청춘들을 향한 위로임과 동시에, 치열한 인생을 살았던 자신을 향해 셀프 덕담을 건넨 것이다.

누구보다 별이 되기를 원했던, 스무 살의 청년은 자신만의 거품을 내며 평생을 살았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적인 성공, 부와 명성을 위한 건 아니었다. 타고난 재능이 있어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고백한 것인지 모른다. 예술가, 창작가, 운동가로 활동할 때보다, 두 자녀의 아버지, 한 여자의 남편일 때 그의 표정이 한결 밝고, 행복해 보였다.


오늘의 나는, 그가 치열하게 살았던 평생의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살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렇다 할 성취는 없고, 세상에 남긴 흔적(거품)도 보잘것없다. 그런데도, 색깔 내며 사는 척, 거품 내며 사는 척하며 세상이 날 잘 몰라준다는 원망은 계속한다. 노력은 게을리하면서도, 요행과 성공을 바랐다.

이제부터, 삶은 보너스라고 스스로 다잡아 본다. 달콤한 라테만 찾지 말고, 아메리카노 커피의 쓴맛에 조금 더 익숙해지기로 한다. 남의 평가나 시선으로부터도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 한때 세상의 전부라 생각했던 조직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동기들의 반 가까이는 이미 퇴직해서 다른 인생을 산다. 회사 내에서의 승진, 이동에 일희일비하거나, 다른 동료의 성공에 배 아파하는 건 스스로 삶을 가두고 제한하는 것이다. 최고위직까지 올랐던 분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직장생활) 성공이 얼마나 짧고, 덧없고, 보잘것없는 것인지 지켜보았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다짐은 아니리라.




현재(Present)가 곧 선물(Present)이다. 내가 하는 일에 충실하고, 오늘 나를 찾아온 고객에게 최선을 다하며, 내 옆자리의 동료들을 진심으로 대하면 된다. 그(신해철)의 메시지대로, 아프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사람의 전성기는 늦을수록 좋다. 언젠가 자신의 주제가가 될 것이라던 [민물장어의 꿈]은, 마치 운명처럼 그의 장례식장에 울려 퍼졌고, 그에게 마지막 행운(가요 프로그램 1위)까지 선물했다. 유년 시절의 다짐대로, 거품을 내며 열심히 살되, 이제 편안하게 받아들이자. 성공은 운(運)이다.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신해철, 민물장어의 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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