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Ending Story
초등학생 시절 부모님이 청주에 있는 우암시장에서 방앗간을 운영하셨다. 밤낮없이 돌아가던 기계소리가 워낙 컸기에, 맞은편 레코드 가게로 자주 피신했다. 특이하게도, 비디오 대여점과 레코드 가게를 같이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사장님은 시대를 한참 앞선 아트 크리에이터(Art Creator)였던 것 같다.
주로, 서민들이 이용하던 장터였기에 손님이 별로 없었던 것 같고, 그래도 내가 가면 늘 반겨주었다. 사장님은 20대 초반 젊은 분이셨는데, 갈 때마다 당시 유행하던 가요나 팝 앨범을 틀어주며, 온종일 음악과 영화 이야기를 해주던 기억이 난다.
TV에서 흘러나오던 전통가요, 선생님의 풍금 반주에 따라 부르던 동요밖에 모르던 나에겐, 신세계였다. 레코드판(LP), 카세트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던 보이스투맨의 하모니, 휘트니 휴스턴의 고음은 경이로웠다. 프레디 머큐리(퀸)의 음색은 슬프고도 날카로워 내 마음을 저격했지만, 메탈리카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사장님의 취향에 맞는 음악만 주로 듣다 보니, 나도 그와 같은 음악을 듣게 되었다. 한국 대중음악 중에는 조용필, 이문세, 김현식, 유재하, 그리고 부활과 이승철의 음악을 주로 들었다. 기타나 드럼 연주자보다 보컬리스트에게 유독 관심이 갔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아버지가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기타를 사 주셨는데,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으니, “이정선의 기타 교실” 악보를 구매해 혼자 끙끙대며 C코드, D코드 쳐가면서 나름 기타리스트 흉내를 냈다. 스스로 감수성 풍부한 청소년임이 분명하다며, 뿌듯해하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초보 수준임을 알기에 어디 가서 나도 기타 좀 친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같은 반 친구가 리더였던 스쿨 밴드에 가입하고 싶었지만,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기타와 보컬을 모집한다는 공고문을 보고도, 먼저 연락하지 못했다.
한창 공부에 열중하던 고등학교 2학년 때, 의례적으로 열리던 학교 축제에, 의례적으로 참석했다. 그런데, 하필 스쿨 밴드 친구들이 연주하던 음악이 스틸하트의 She’s gone, 부활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 이승철의 마지막 콘서트(부활의 회상 3)였다. 구경 온 여고생들은 환호했고, 나는 한참을 잊고 지내던 어린 시절의 레코드 가게가 생각났다. 그때부터 이승철이라는 보컬리스트를 동경했던 것 같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노래는 후천적으로 노력보다는 선천적 재능이 훨씬 중요하다는 점을 일찍 수긍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꼭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과연, 내 눈앞에서도 CD 속 목소리처럼 노래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연락을 해야 했다.
1996년 대학에 진학해 상경했고, 그해 버킷리스트 1번이었던 이승철 콘서트를 관람하기 위해 세종문화회관을 찾았다. 소심한 시골뜨기였지만, 공연을 보고 난 후 그와 인연을 맺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샘솟았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었고, 있었어도 연락처는 알지 못했을 터였다. 다행히, 당시 유행하던 PC 통신(천리안, 나우누리)을 통해 다음(Daum) 카페에 [이승철과 새침떼기]라는 공식 팬클럽이 있음을 알게 됐다. ‘새침떼기’라는 팬 클럽명부터 왠지 여성스러워 멈칫했지만, 과감히 용돈을 털어 정식회원에 가입했고, 정모(오프라인 정기모임)에 참석했다.
아니나 다를까, 참석자의 9할은 여자였고, 남자는 나를 포함해서 서너 명 정도였다. 부끄러움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더구나, 다른 남자분들은 이미 여러 번 참석 경험이 있으셨는지, 회장단과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나, 나는 술의 힘을 빌려서야 간신히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렇게 두 번, 세 번 꿋꿋이 모임에 나갔고, 어느샌가 나는 그곳에서 [청주 군바리]라는 닉네임(아이디)으로 불렸다. 물론, 여전히 주변인에 불과했고, 군중 속 고독감을 느끼던 기억이 생생하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정모에 나갔던 이유는 명확했다. 그가, 팬클럽 회원들과 자주 소통하고, 저녁 만찬 또는 늦은 술자리 번개모임에 참석하는 데 거리낌 없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쭈뼛거리면서도, 어색한 공기를 없애고자, 같은 테이블 누님들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주변이 술렁거렸다. 근처에서 공연을 마친 그가, 이곳에 들린다는 전언이었다. 잠시 후 매니저가 먼저 도착해, 자리를 정리했고, 곧이어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가 도착했다.
“애경이 또 나왔네”
“너 고3 아니냐, 공부 안 해?... 엄마한테 혼나도,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라”
“태풍이, 오랜만이야. 장사는 잘 돼?”
“회장님은 이 시간에 여기서 술 마시고 있으면, 남편이 뭐라 안 해?”
이건 내가 상상하던 TV 속 스타, 별의 느낌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래도, 특유의 자신감과 약간의 거만함은 생각했던 그대로여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넌 이름이 뭐니?”
“저는 아이디가 청주 군바리예요. 얼마 전에 카페에 제가 작성한 글에 댓글도 달아주셨는데... 음악방송 하실 때, 스탠딩 마이크 하나만 놓고 라이브 하는 모습 보고 싶다고 했더니, ‘아주 소설을 써라, 소설을. 다들 뭐 이렇게 요구하는 게 많아?’라고 하셨는데... 기억... 안 나시죠? ㅎㅎ”
“아, 네가 청주 군바리구나, 반갑다”
그날 이후로, 공연장에서, 등산모임에서, 그리고 경기도 가평에서 열린 체육대회에서, 난 여러 차례 그와 동석했다. 심지어 대학 시절, 친하게 지낸 동기가, 그의 여자친구와 잘 알고 지내는 사이여서, 팬클럽 모임과는 별개로, 사석에서도 두어 번 인사를 나누고, 조촐한 술자리를 가진 적도 있다. 그 인연으로, 공연장 맨 앞자리 VIP 석에서 다른 셀럽들(축구선수 고종수, 안정환 등)과 섞여서 콘서트를 관람한 적도 있다.
지금이야 시간이 많이 흘러, 나도 그를 예전처럼 많이 생각하지 않고, 그도 나를 잊었겠지만, 당시 그의 눈빛과 말투는 나를 ‘아는 사람’으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나는 먼저 연락했고,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화답했다. 생생하게 꿈꾸면, 꿈은 현실이 된다.
인생에는 부침이 있기 마련이다. 하늘이 준 재능(달란트)을 타고난 그의 인생 역시 그러하다. 스무 살, 약관의 나이 때부터 유명해지고, 인기를 얻었으니, 탈이 날 만도 했다. 율곡 이이 선생은 삶의 3가지 불행으로 소년등과(少年登科), 중년상처(中年喪妻), 노년빈곤(老年貧困)을 꼽았다. 어린 나이에 성공하면 인생의 고뇌와 진수를 겪어보기 전에 자만과 방탕에 빠지기 쉽다. 여러 사건 사고에 휘말리며, 오르막과 내리막을 겪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는 이미 유명하다. 그러나, 부침에도 불구하고, 30년 이상 그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지 않고, 지금의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건, 그가 기다리지 않고, 먼저 연락을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사람은 거품을 내면서 살아야 하지만, 대중가수의 인기에는 유독 거품이 많이 끼어있다. 영원할 것 같은 거품은 꺼지기 마련이다. 계속 실력을 담금질하고, 시대의 유행과 감성에 뒤처지지 않아야 하며, 무엇보다 과거의 영광을 빨리 잊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는 2000년대 초반, 여러모로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 같다. 히트곡, 앨범판매량, 대중의 관심도 모두 예전 같지 않았고, 늘 매진이던 공연장에도 빈자리가 늘었다. 어느덧 사람들은, 30대인 그를 한물간 가수라고 표현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김태원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그룹 부활의 멤버로 함께 활동했던 그들이 헤어진 지도 어느새 15년. 당시 김태원은 홀로 밤낚시를 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원한다면 다시 보컬 오디션도 보겠으니, 함께 의기투합해 보자는 그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인생의 내리막을 걷던 마흔 줄의 두 예술가는 그렇게 다시 만나 Never ending story를 발표했고, 부활했다.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보고 싶은 사람,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길이 있다면, 먼저 연락을 해야 한다. 천하의 이승철도, 한 수 접고, 낚시로 세월을 보내던 재야의 고수에게 먼저 연락했고, 도움을 요청했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다가가야 한다.
콘서트 수익금으로 아프리카 차드에 우물 짓기, 학교 짓기, 심장병 어린이 돕기 등 선한 영향력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그에게는 다양한 분야에서 협업 요청이 있다고 한다. 그중에는 북한 출신 대학생과 졸업생들이 설립한 (탈북) 합창단 ‘위드유’도 있다. 의미 있는 공연을 준비하던 그들을 만나, 그(이승철)와 그의 배우자는 최초로 독도공연을 추진했고, 성공시켰다. 유명인이라고 해서 그냥 성사되는 게 아니다. 독도에서의 공연을 추진하다니, 그것도 탈북합창단과 함께. 기획은 쉽지만, 스태프를 꾸리고, 관공서에 업무협조를 구하고, 공연 인허가를 받아내는 것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공연 당일의 날씨, 독도 입항까지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을 터다. 하지만, 여러 측면에서 의미 있는 프로젝트라고 확신했던 그는, 결국 합창단의 마에스트로(지휘자)로 독도에 섰다. ‘그날에’ 외로운 섬, 새들의 고향에는 그렇게 ‘홀로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먼 훗날, 남과 북이 통일되면, 아마 독도에서 합창한 ‘홀로 아리랑’이 주제가로 불릴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친김에 그와 그의 배우자는 미국 하버드대와 UN 회의장에서도 통일 노래(그날에) 부르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노래를 완성한 후, 직접 하버드대와 UN 측에 장문의 이메일과 함께 뮤직비디오, 가수 소개서 등을 보냈고, 마침내 공연 승인을 받아냈다. 근엄한 UN의 어르신들이 어떻게 한국의 대중가수를 알았겠는가. 공연의 취지를 설명한 이메일, 동영상(뮤직비디오)에 담긴 진정성과 메시지에 화답했던 거다. 남북 합창단, 독도, 하버드, UN, 그리고 이승철. 이질감이 느껴지는 다섯 개의 단어가 한데 어우러져 멋진 이벤트(역사)를 완성했다. 체면도 상하고, 무모함에 후회도 있었겠으나, 먼저 연락을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가수로서의 노래 실력 이외에, 그가 제2 혹은 제3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데는 대국민 노래오디션 ‘슈퍼스타 K’ 열풍 덕도 크다. 가수가 되고 싶거나, 자신의 노래 실력을 뽐내고 싶거나, 스타가 되고 싶었던 수많은 이 땅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드디어, 마침내, 꿈의 등용문을 제대로 알아보았고,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연락을 한 것이다.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지원했으나, 모두가 자신의 성공을 확신했던 것은 아니다. 서인국, 허각, 존 박, 장범준(버스커버스커), 울랄라세션, 박재정 같은 무명의 가수(음악인)들도, 지체하지 않고 먼저 연락을 했고, 상대방이 화답하자 마침내 별(스타)이 되었다.
내가 1등이 되지 못했다고, 실망할 일은 아니다. 당장 스타가 되진 못해도, 경험치와 필모그래피는 쌓인다. 예선탈락을 한다 해도 부끄러움의 시간은 짧고, 근사한 추억은 영원히 남는다. 꾸준한 시도(Trial and Error)는 의외의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볼빨간사춘기(안지영)는 슈퍼스타 K 3회, 4회, 5회, 6회에 참석해 연거푸 탈락했으나, 결국, 그의 재능을 알아본 연예기획사와 전속계약을 체결했고, 지금은 스스로 빛을 내는 스타가 되었다.
업무상 알게 된 어느 방송사 출신 드라마 제작업체 대표님이 있다.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중소규모의 엔터테인먼트 회사인데도, 오디션을 희망하는 (무명) 배우들의 프로필이 계속 쌓인다고 한다. 갑자기 촬영 일정이 잡히면 주연/조연 외에도 단역배우가 필요한데, 그때 자주 방문했던 사람, 꾸준히 연락했던 사람에게 연기의 기회를 준다고 했다. 그게 인지상정이고, 세상사 이치다. 단역이 쌓이고 쌓여 조연이 되고, 오디션에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진 끝에 조연 연기자로 자리 잡는다.
물론, 압구정 카페의 아르바이트생 정우성, 롯데리아의 햄버거 소녀 남상미처럼, 가만히 있어도 길거리 캐스팅으로 스타가 되는 우월한 유전자들이 있다. 원래, 예외 없는 규칙은 없는 법. 그런 천운을 기다리기 전에 먼저 자신을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임재범, 이승철, 나얼 수준의 가창력, 정우성, 이정재, 장동건 정도의 외모를 갖지 않은 이상, 99%의 확률로, 가만히 있으면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타고난 재능은 신도 질투한다. 얼마나 많은 예술가, 음악인들이 젊은 나이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일찍 요절했는가. 유재하도, 김현식도, 김광석도, 임윤택(울랄라세션)도, 김재기(부활)도 결국, 신의 질투를 이겨내지 못했다. 특출 난 재능이 없어 종종 열등감에 빠지고 마는 우리네 인생은 길다. 따라서, 원하는 바, 만나고 싶은 사람, 가고 싶은 회사가 있으면, 먼저 연락하고, 계속 시도한 후 그저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세 번, 네 번, 계속 연락한 끝에 그제야 답을 주는 브런치처럼!
2년 후면 데뷔 40년이 되는 이승철과 김태원. 이제 곧, 그들도 귀가 순해져 모든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耳順)가 된다. 개인적 애증을 뛰어넘어, 누군가 먼저 연락을 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20년 전 그들이 만들고 부른, 끝이 없는 이야기(Never ending story) 속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 가기를’ 노랫말처럼 말이다. 나의 생생한 예감은 현실이 되고, 이 글은 2년 후 성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