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도 기업도, 그리고 개인도..
나는 커피를 즐겨 마신다. 커피 원두 본연의 스트레이트(Straight)한 풍미를 맛볼 수 있는 아메리카노보다, 연유와 시럽, 그리고 약간의 거품이 얹어진 카페라떼를 더 좋아한다. 다소 촌스러워 보이고, 진정한 커피 맛을 모르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들어도 할 수 없다. 거품 든 커피의 달콤함이 내게 선사하는 안도감과 기쁨이, 담백하지 못하다는 다른 이들의 시선, 눈초리보다 더 가치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오락실에서 즐겨하던 게임 중 하나가 버블버블이다. 같은 색깔의 버블들이 모여서 팡! 터져야 점수가 올라가는 단순한 게임이었다. 거품이 터지는 데서 오는 묘한 쾌감을 즐겼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내가 거품 낀 커피를 좋아하는 것은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인류는 농업혁명을 경험하기 이전 수십만 년 동안 수렵채집의 시대를 살았다. 그 시절 호모 사피엔스는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자급자족의 삶을 영위해야만 했고, 그렇기에 삶의 양식에 거품이 낄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인류 최대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농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근심과 걱정은 점점 쌓여갔고, 잉여 생산물이 쌓이면서 경제에 거품이 생겨났다.
한 곳에 정착하며 농사를 지어야 먹고, 자고, 싸울 수 있었던 우리의 조상들은, 밤낮없이 일하고, 수확하며, 먹기를 반복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적절한 비와 햇빛과 바람이 오고 풍년이 들기를 밤낮없이 기도해야 했다. 걱정하고 근심하는 인류의 DNA는 그대로 복제, 전송되어 21세기에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가 종종 이유도 없이 불안해지고 초조한 것은, 수만 년 유구한 인류사에 그 뿌리가 있는 것이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수만 년 동안 이어져 온 인간의 DNA 속 이기적 유전자다. 기술과 문명이 진화하면서, 하늘과 신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졌으나, 반면, 통제하기가 힘든 인간의 욕심은 커져만 간다. 종족 번식, 내 가족과 사촌의 번영을 위해서 같은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우리의 욕심이 커진 것은 우리가 필요 이상의 양을 만들어 내고, 소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품의 시대에 살고 있다. 쌀과 밀도 그렇고, 옷과 신발, 노트북과 스마트폰, 더 나아가 돈과 집도 필요 이상으로 만들어지고, 소비되며, 심지어 (남몰래) 버려진다. 중세 시대 유럽의 영주나, 조선시대 경주 최부자 댁은 모두 엄청난 양의 쌀과 밀을 생산했지만, 태생적으로 수요와 공급 곡선을 이해하였기에(인간의 이기심), 모든 생산물을 시장에 판매하지 않고, 창고에 비축할 줄 알았던 거다. 누군가 초과 생산물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공급을 통제하는 순간, 자본가(부자)와 노동자(빈자)로 상대적 계급이 생기는 건 필연적이다. 인류가 자급자족, 수렵채집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거품(잉여 생산물)이 생겨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물론,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19세기 초반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섬유기계 파괴운동), 20세기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그리고 21세기 미국의 월가 점령운동(Occupy Wall Street)에 이르기까지, 잉여 생산물에 대한 편중된 소유권과 인간의 욕심에 대한 경고음은 늘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돌아가기에 인류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다. 자본주의를 대체할 만한 수단이나 체제도 마땅치 않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인 시대는 이미 지났고, 지금은 생산된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소비심리를 자극하는) 환상적인 광고가 수요를 창출해 내고, 소비와 소유는 실질적인 쓸모와는 별개로, 만족감, 남다름, 우월감 같은 특유한 (이기적) 유전자에 부합해 기꺼이 우리의 지갑을 연다. 그리고, 우리의 소비행위는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 기술의 진보, 국민경제 성장 같은 공공적 구호로 정당화된다.
솔직히 고백건대, 나는 비트코인, 메타버스, 인공지능(AI)의 실체와 가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 메커니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가까운 시일 내에 어떻게 내 삶에 영향을 미칠지도 가늠하기도 어렵다. 다만, 4차 산업혁명 같은 미래지향적 단어와 결합되어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니, 큰 가치가 창출될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현재, 우리는 디지털 자산 거래소 빗썸에서 1 Bitcoin이 원화 3천만 원과 등가 교환되는, 믿음과 상상이 현실이 되는 거품의 시대를 살고 있다.
현실 속,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내는 모든 최종 생산물들의 가치는 국내총생산(GDP)의 규모로 확인된다. 2021년 말 기준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GDP 총액은 2,071조 원 규모다. 미국(1/12), 중국(1/9)과는 차이가 큰 편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전 세계 국가 중 10위권 수준이다. 인구 5,000만 명으로 나누면, 1인당 평균 GDP가 산출되는데, 약 4,100만 원 정도다. 실로, 엄청난 숫자다.
소위 말하는 선진국의 조건, 인구 5천만 명 이상, 1인당 GDP가 3만 달러 이상인 국가 중 우리나라의 순위는 6위 수준이다. 이탈리아보다 높은 수치다. 경제 규모 기준, 대한민국은 명실공히 선진국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알게 된 이상, 이상한 호기심이 샘솟는 것은 당연지사요, 내 소득 수준과 비교하게 된다. 물론, GDP는 정부, 기업, 가계의 총생산량*을 더한 값이기에, 인구수로 나누어 1인당 GDP 평균값을 구하더라도, 내 연봉(소득)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 모른다.
* 실제, 한국은행 통계 시스템에서 확인한 결과, 2021년 기준 국내총생산에 대한 가계 지출 총액은 약 922조 원으로, GDP 총액의 44% 수준임
4인 가족의 가장 입장에서, 1인당 평균소득(4,400만 원)에 4를 곱하니 무려 1억 7천6백만 원이 산출된다. 심지어 이 금액은 2021년 기준이니, 2년간 경제성장률을 추가로 고려하면, 적어도 1억 8천만 원은 족히 넘을 것이다. 아무리 심심풀이로 비교해 본 것이라지만, 고민이 깊어지는 대목이다. 내가 평균 이하에 해당하다니..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의 경제 규모와 성장 속도에 경이로움을 느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속도와 방향을 잃은 채 나 홀로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금 걱정과 근심의 오래된 DNA가 활성화되는 기분마저 든다.
2,071조 원 정도의 경제 규모는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누가 함부로 통제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다. 그냥 그렇다고 인정해야 할 뿐이다. 분명, 우리는 직관적으로 이 수치에는 분명 거품이 끼어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파트, 자동차 같은 사치재뿐 아니라, 스마트폰, 휘발유, 소고기 같은 소비재에 더해 가상공간 속 상상의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무형자산(암호화폐) 역시 기꺼이 거래한다. 폭탄 돌리기를 하되, 부디, 그 폭탄이 내게서만 터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래서, 모든 정부는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경제성장률, 즉, GDP의 증가에 둔다. 어느 국가의 국민도 자기 재산의 가치가 하락하거나, 정체되기를 바라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때문만도 아니다. 성장률이 0.1%만 하락해도 그 규모가 2조 원에 달하고, 이는 바로 나와 내 동료의 일자리, 생계와도 직결되는 문제다. 1997년 IMF 구제금융,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겪으며 우리는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이 주는 끔찍함을 직접 경험했다.
명확한 정답은 알지 못하더라도, 정부는 국가 경제의 규모가 줄어들지 않고, 플러스알파(∝)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몇 가지의 가능성에 투자를 지속한다. 인공지능, 메타버스, 사물인터넷, 바이오, 전기차, 항공우주, 가상화폐 등등. 어떤 산업이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의 삶을 더 윤택하고 가치 있게 만들어 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금액의 투자가 실패하더라도, 쉽사리 과거로 회귀하지는 않을 것임은 명확하다. 정부투자의 과정에서 일정 부분 투자의 과잉(거품)이 발생하는 것도 불가피하다. 실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경제학 교과서에서처럼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는 곳이 아니다.
* 물론, 언제 어디서나, 양적 경제성장의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는 존재한다. 그리고, 정부가 성장과 복지, 두 분야 사이에서 조화를 추구해야 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이 성숙한 민주주의 시대, 정부의 역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고민은 정부 선택, 철학의 영역이며, 내가 논할 수준을 넘어선 주제다.
기업은 또 어떠한가. 우리나라에만 총 705만 개의 기업이 활동하는데, 그 경쟁의 치열함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소비자의 제품 선택에는 국경도 따로 없다.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홍보하는 시대에, 우리나라의 현명한 소비자가 아마존에서 해외기업의 제품을 구매(수입)한다고 뭐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애국심이 통하지 않는 시대, 기업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소비자의 마음을 훔치고, 효용을 제공해야 한다.
일류 대기업이 아닌 이상, 아니, 대기업 제품이라 하더라도, 경쟁사의 제품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제품의 차별성도 크지 않을뿐더러, 하늘 아래 새로운 제품도 없다. 승부는 대부분 추상적 형용사로 갈린다. 심리적 만족감, 행복감, 효용감, 차별감, 특별함, 고귀함, 안정감 등등. 원두 가격 수백 원으로 만들어지는 카페라떼 1잔의 소비자 가격이 2천 원부터 2만 원까지 천차만별임에도, 각각의 스토리텔링에 힘입어 판매된다. 커피에 거품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우리 개개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영화 [리틀 포레스트] 속 주인공처럼 현실에서 벗어나, 시골로 내려가서 직접 채소 키우고, 음식 만들어 먹으며, 소확행(小確幸: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삶을 살 수도 있다. 아침, 점심, 저녁 직접 몸으로 노동하며 과실을 수확하는 삶은 그 옛날 수렵채집, 자급자족을 하던 시대와 맞닿아 있다. 거품 없는 인생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이고, 일시적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일상 속 마주하는 모든 일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제네럴리스트(Generalist) 라기보다는, 자신이 남보다 조금 더 잘하는 일에 특화하고, 부족한 부분은 남과 거래하는 스페셜리스트(Specialist)에 가깝다. 막상, 소확행을 지향하더라도, 엄연한 현실의 삶을 오랫동안 외면하기 어렵고, 그 많은 육체노동을 감당하지도 못한다. 우아한 시골 생활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하다.
그렇다고, 영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나 [빅 쇼트]의 주인공들처럼 일확천금만을 노리며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가 부자가 되려고 남에게 사기를 치거나, 경제 붕괴 또는 타인의 파산에 베팅(풋옵션)을 하는 것은, 설령 나에게 부를 가져다줄지언정 삶을 불행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의 금융 천재, 억만장자 기업가들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뱁새가 황새를 쫓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 거품만 가득한 인생도,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이고, 위태롭다.
우리는 자신의 깜냥껏 흔적 있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스펙(경험)을 쌓고, 자격증을 취득하며, 직장(직업)에서 성과를 내 몸값을 높이거나, 이직 또는 창업을 하는 것, 직업을 통해 소득을 얻고, 자산을 증식해 나가는 것, 부동산과 주식 또는 코인을 공부해 근로소득 이외의 금융소득을 창출하는 것. 이 모든 과정에는 노력이 수반되고, 성공과 실패가 뒤섞여 있으며, 결과도 섣불리 장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과정을 겪으며 내면은 성장하고, 꾸준한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의 성과도 창출될 것이다. 무엇보다 후회가 남지 않고, 행여, 실패하는 경우라도 시도의 흔적과 인생의 스토리는 남는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세상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며, 가치를 높이기 위한 시도를 하지 않는 인생은, 거품은 끼지 않을지언정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임은 확실하다.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삶이겠으나, 좀 거칠게 표현하면, 흔적 없는 인생이다.
돌이켜보면, 내 삶도 실패의 연속이다. 가고 싶은 대학에 입학하지 못해 재수를 했고, 원하던 직장(언론사)에도 수차례 떨어졌으며, 회사 내 승진도 늦다. 주식투자로 족히 일억 원 이상은 날렸고, 부동산 투자에서도 재미를 못 봤다. 아, 비상장 주식(스타트업)에 투자했다가 회사가 망해 사천만 원이 사라진 것, 친구에게 삼천만 원 빌려줬다 돌려받지 못한 기억도 새록새록 난다. 가장 최근에는, 6개월간 심혈을 기울여 어느 IT 기업에 사업 계획서(백서)를 만들어 주고도, 노력과 성과에 대한 보상 한 푼 못 받은 경험도 있다.
하지만, 삶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노력과 시도들은, 어떤 식으로든 결과로 나타난다. 좋지 않은 머리라도, 밤늦게까지 공부해 흔히 말하는 일류대를 졸업하고, 금융기관에 취업할 수 있었다. 늘 상상하던(직업, 성격) 유형의 배우자와 결혼해 아이 둘을 낳았고, 부동산 경매를 통해 서울에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원치 않던 발령지에 근무하는 동안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 학위도 받고, 몇 편의 논문과 브런치 작가로 데뷔하는 기회도 얻었다. 엔젤투자자로서의 실패 경험도 성장성이 무궁한(!) 스타트업 돌우물과 만나면서 조만간 빛을 발할 예정이다.
누구나 한번 사는 삶이다. 인생이란 자기 수준에 맞는 거품을 계속 만들어 내고, 설령 그 거품이 터지더라도, 그 상황에 맞는 거품을 다시 내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과정이 아닐까. 시간이 흐르면, 그 거품의 흔적들이 내 삶의 궤적, 그리고 성과로 남는 것이다. 남의 시선에 신경을 덜 쓰고, 나만의 거품을 내며 살아가면 될 일이다. 그것은 허영심이 아니라, 카페라떼의 거품처럼 내 인생을 달콤하고, 풍요롭게, 그리고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갑옷 같은 것이다. 이제 걱정은 내려놓고, 우리는 거품을 내며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