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 뒤늦은 후기
말과 글은 가슴에 새겨진다. 마음 깊숙이 꽂힌 언어는 지지 않는 꽃과 같다. 언어의 온도가 너무 높으면 소중한 사람이 곁을 떠날 수도 있고, 온도가 너무 차가우면 누군가 나를 향한 마음의 문을 닫을 수도 있다.
자기가 아픈 걸 어떻게 그리 잘 아느냐는 손주의 질문에 할머니는 대답한다.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라고. 상처를 겪어본 사람은 남보다 그 아픔을 잘 알기 때문에 더 이해의 폭이 넓어질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암 환자가 돌봄을 받는 호스피스 병동에선 말 한마디의 값어치와 무게가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어느 나이 지긋한 의사는 팔순을 훨씬 넘긴 환자를 대할 때도 ‘환자’ 혹은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대신, ‘박 원사님’, ‘김 여사님’하고 인사를 건넨다.
우리는 언어의 총량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다언(多言)이 실언(失言)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경북 예총에 가면 <언총>이라는 말 무덤이 있다. 그 말 무덤에 묻어야 할 말을, 소중한 사람의 가슴에 묻으며 사는 건 아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아빠야, 잘 지내? 그냥 한 번 걸어봤다”는 전화 통화의 숨은 뜻, “안 본 지 오래됐구나. 이번 주말에 집에 들려주렴” “보고 싶구나, 사랑한다”의 의미이다. “그냥”이라는 말은 대개 별다른 이유가 없음을 의미하지만, 굳이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냥은 정말이지 ‘그냥’이 아니다.
상대를 자신의 일부로 여길 수 있는지 여부가 진실한 사랑과 유사 사랑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된다. “사랑해요”라는 말 대신 “당신은 정말이지 5월을 닮았군요” 같은 마른침을 삼킨 후의 고백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우린 흔히 사랑에 이끌리게 되면 황량한 사막에서 야자수라도 발견한 것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다가선다. 하지만, 낭만적 연애의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낭만적 연애기, 그 이후의 일상에서 진정한 사랑은 확인된다. 알랭 드 보통의 소설처럼 말이다.
엘튼 존은 “미안하다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말인 것 같다.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고 노래했다. 사과는 나이가 들수록 어렵게 느껴진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꺼내는 사람은 승자가 아닌 패자로 간주된다.
하지만, 사과를 뜻하는 단어 ‘apology’는 그릇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말‘이라는 뜻이 담겨있는 그리스어 ’apologia’에서 유래했다. 얽힌 일을 처리하려는 의지와 용기를 지닌 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승리의 언어가 사과인 셈이다. 사과는 아름다운 것이다.
대지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치고 사연 없는 이가 없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몸뚱어리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우주만 한 크기의 사연 하나쯤은 가슴속 깊이 소중하게 간직한 채 살아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정과 까닭을 너그럽게 들어줄 사람이 많지 않은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의 가슴에는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하나씩 나 있다는 점을 기억하도록 하자.
위로의 표현은 잘 익은 언어를 적정한 온도로 전달할 때 효능을 발휘한다. 짧은 생각과 설익은 말로 건네는 위로는 필시 부작용을 낳는다. 정말 힘든 사람에게 분발을 종용하는 건 위로가 아닌 강요일 수 있다. 위로는 헤아림이라는 땅 위에 피는 꽃이다. 상대의 감정을 찬찬히 느낀 다음, 슬픔을 달래 줄 따뜻한 말을 조금 느린 박자로 꺼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글쓰기는 그림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공통분모는 ‘그리움’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종이에 긁어 새기면 글이 되고, 그러한 심경을 선과 색으로 화폭에 옮기면 그림이 되는지도 모른다.
기다림은 그런 것이다. 몸은 가만히 있더라도 마음만큼은 미래를 향해 뜀박질하는 일. 그렇게 희망이라는 재료를 통해 시간의 공백을 하나하나 메워나가는 과정이 기다림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 공백을 채워야만 오는 게 있다. 기다려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있다.
미셀 공드리 감독의 영화 ‘이터널 선샤인’. 헤어진 연인에 대한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던 조엘은 족집게로 새치를 뽑듯 아픈 기억만을 선택적으로 없애준다는 회사를 찾아간다. 하지만 추억을 도려낼수록 가슴 깊이 남아있던 추억의 조각들이 꿈틀꿈틀 되살아나 그를 괴롭힌다. 기억은 때로는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선명해질 뿐이다.
화향백리(花香百里), 인향만리(人香萬里). 아무리 진한 꽃향기도 그윽한 사람 향기에 비할 수는 없다. 깊이 있는 사람은 묵직한 향기를 남긴다. 사람의 향기는 그리움과 같아서 만 리를 가고도 남는다.
사람, 사랑, 삶은 단어의 유사성이 있다. 그리고 사람은 사랑을 이루면서 삶을 살아간다.
굿 윌 헌팅의 주인공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숀 맥과이어’라는 심리학 교수는 유년 시절의 상처로 방황하는 수학 천재 윌이 자책과 분노로 괴로워하자, 그를 위로하며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을 해준다. 윌이 듣고 싶어 한 유일한 문장이자 그가 들려주고 싶었던 유일한 문장이다.
이런 멋진 대사를 선물한 로빈 윌리암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인생의 아이러니다. 우울한 사람의 마음을 가장 많이 위로한 사람이 우울증으로 세상을 등질 수도 있다는 것. 인생의 바다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은 길을 잃는다는 것. 가끔 삶이 버겁거나 내가 느끼는 죄책감이 비겁함으로 둔갑하려는 순간,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언어는 묘한 안도감을 선사한다.
익명성을 방패삼은 인신공격성 발언과 악성댓글이 난무하는 요즘, 다시금 향기로운 '언어의 온도'를 떠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