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다가도 모를 투자의 세계
정답은 없을지언정.
얼마 전 K로부터 연락이 왔다. 드디어 투자받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긴 장마와 무더위로 지쳐있던 중 오랜만에 들려온 반가운 뉴스다. 총액은 무려 150억 원에 이른다. 물론, 부럽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간의 노력, 맘고생을 익히 알고 있기에, 고생 많았다는 진심 어린 격려, 오래된 꿈에 한발 다가선 데 대한 축하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
혹자들은 15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 숫자만을 보고, 시기와 질투의 마음을 가질지도 모를 일이다. 솔직히 내가 제삼자의 입장이라도 그럴 법하다. 남의 떡이 커 보이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기 마련이다. 실제 네이버 주식토론방을 들어가 보아도, 반응은 나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슨 대단한 기술력이냐고, 자기가 보기엔 별것 아니라며, 투자받은 기업을 폄훼하느라 여념이 없다. 저마다 회사의 이번 투자 결정, 신주인수권부 사채인수가 오늘의 최종 시세에 미칠 영향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의견들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하긴, 여태 네이버 주식토론방에서 긍정적인 이야기는 별로 본 적 없으니, 뭐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다.
투자기업 H는 신성장동력을 찾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H는 철강 제품 생산을 주력 사업으로 영위 중이었다. 이른바, 전통 산업, 굴뚝 산업이라 할 수 있다. 성장을 거듭한 끝에 코스닥기업으로 상장까지 했으니, 드라마틱(Dramatic)하게 성공한 기업의 전형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터다.
언뜻 보기엔, 그냥 기존에 하던 사업 꾸준히 잘하고, 해당 분야에서 지속적 경쟁우위를 창출하는 게 최선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렇게 회사의 명운(命運)을 건 대규모 투자가 성사되는 걸 보니, 실제 기업경영은 교과서 밖 영역임이 확실하다.
일반적으로, 주가는 기업이 영속적으로 사업을 영위하는 계속기업(Keep-on going company) 임을 가정하고 산출된다. 재무학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원한 기업은커녕, 100년, 50년, 아니 30년 이상 지속되는 기업의 수도 몇 안 된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큰 대기업, 재벌이라 하더라도, 오늘의 매출 실적에 민감하고, 내일의 먹거리를 계속 찾기 마련이다. 물론, 통장잔고가 수천억 원, 수조 원에 이르는 일부 초거대기업, 재벌기업들의 위기론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어디서든,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
수요가 꾸준한 철강 제품을 생산하는, 총자산 이천억 원, 연간 매출액 천오백억 원의 코스닥기업도 위기의식을 느끼는 게 실제 기업 현장이다. 투자는 오랜 고민과 검토 끝에 내린 심사숙고의 결과일 터다. 미래를 위한 선제적이고 과감한 결정이라 볼 수도 있겠다.
웬만한 중견기업이라 해도, 여유자금으로 통장에 150억 원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는 거의 없다. H도 I에 대한 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환사채*를 발행했다. 이 정도면, 기업의 총체적 의사결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전환사채 : 일정 기간 경과 시 주식으로 전환될 권리가 부여된 회사채
언론지상에 "몇백억 원 투자유치 성공, 그로 인해 돈방석에 앉은 CEO" 같은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종종 나오다 보니, 투자라는 고도(高度)의 업무가, 단순한 돈 넣고 돈 먹기, 흥밋거리 정도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 투자의 세계는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의 영역으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특히나, 이번 I 기업에 대한 투자 결정과 같이, 재무적 투자가 아닌, 전략적 투자인 경우, 더욱 그러하다.
재무적 투자자는 기술력, 사업 아이템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초기 투자, 중기 투자, 장기 투자와 같이 시기별로 나누어 투자함으로써 투자 위험을 줄인다. 그리고, 다수의 투자자가 협의하는 과정을 거쳐 기술성, 사업성을 함께 검토하는 한편, 공동 투자로 초기 투자 부담감도 줄일 수 있다.
각종 옵션을 붙여 이게 진짜 투자인지, 아니면, 사채인지 헷갈리게 하는 경우도 많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품도 계속 생겨나는 중이다. 눈으로 드러나는 자산이 별로 없는 초기기업에 대한 투자인지라, 한번 잘못되면 건질 게 없고, 손실은 막대하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돈 백만 원도 쉽사리 빌려주지 못하는 게 우리네 실상이다. 그런데, 하물며 금전 차용증도 아니어서, 돈을 다 잃는다 해도 파트너(투자받는 기업)에게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는, 선량한 투자자에게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초기 투자자를 천사(Angel)로 부르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반면, 전략적 투자는 대다수의 경우 나 홀로 투자다. 지분율 50% 이상을 확보해 경영권을 인수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투자 금액도 커진다. 생존과 성장을 위한 승부사적 의사결정이다. 업무협조를 위한 양해각서(MOU) 체결, 물건 납품을 위한 계약체결과는 차원이 다르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되, 한번 결정을 내린 이상 과감하게 상대방에게 베팅해야 한다. 그러나, 성공 여부는 불투명하다. 앞 날은 한 치 앞도 예측하기 어렵다. 두 기업의 임직원과 이해관계자(주주, 채권자, 거래처 등)의 생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투자란 그런 엄청난(!) 의사결정이다.
H 기업은 전통 제조업 사업 모델로는 미래 수익성을 지속하기 어렵다고 보고, 3D 동영상 및 각종 디지털 전문기술을 보유한 I를 파트너로 선택했다. 제조 현장부터 제품 설계까지, 인공지능을 활용한 3차원(3D) 도면을 활용해 생산 공정을 개선하고, AI와 메타버스를 활용한 새로운 산업으로의 진출도 기대할 터다.
중견 코스닥기업의 선택을 받은 I가 새삼 대단해 보인다. 수개월 동안 벤처투자사, 기업, 은행, 금융공기업 등은 예비투자자라는 명목하에 부대표 K를 희망 고문했다. 그런데도, 그는 수많은 외부인에게 늘 최선을 다해 회사를 홍보하고, 어떤 피드백과 조언을 듣더라도 기꺼이 수용했다. 그런 과정에 따른 정당한 결과인 듯하여 다행스럽다. 서로 딱 맞는 파트너를 만나 함께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내가 다 뿌듯하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한눈팔지 않고, 앞으로 정진하는 일만 남았다.
내가 투자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얘기가 아니다. 시작은 사촌 동생이 운영하는 회사 돌우물 때문이다. 그전엔 난 그냥, 내 가족, 친구, 재테크, 굳이 범위를 더 넓히면, 우리나라 거시경제 정도에 관심을 두던 직장인, 생활인에 불과했더랬다. 돌우물이 아니었더라면, I 기업에 관심을 둘 일도, 직접 투자를 추천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회사에서 하는 일이 기업금융이다 보니, 거의 기계적으로 기업 신용평가를 수행하며 살아왔다. CEO의 기업설립 계기, 사업 아이템 선정 이유, 주주들의 투자 배경, 초기 역경 극복 사례 등 기업 특유의 서사에 관심을 가지기보단, 드러나는 숫자(재무제표, 매출액 등)에만 집중해 왔던 게 사실이다. 고백하건대, 난 반쪽짜리 금융인에 불과했다.
기업금융은 철저하게 채무상환 능력을 중심으로 기업을 바라본다. 그러다 보니, 교과서적인 접근이 유효하다. 한 기업에는 어느 정도의 대출금이 나가면 적정하겠다는 게 거의 정해져 있다. 업종, 아이템, CEO 역량, 지식재산권(특허권, 실용신안권, 상표권 등), 주주구성 등에 집중하기보단, 아무래도 2~3개년 재무제표, 최근 매출액, 주요 거래처 등 과거의 데이터, 고작해야 현재 상황에 주목할 뿐이다. 그래도, 최근 들어 기술성과 성장성, 사업 실현 가능성 등 미래지향적인 지표들이 도입되고 있어 다행이다.
그렇게 지내오다 보니, 세상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보수적인 시각과 의심 어린 눈초리로 고객(기업)을 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나의 부모님도, 친형제도 사업을 하며 살아왔고, 난 옆에서 그걸 지켜보았지만, 심도 있는 고민으로 힘을 보태지 못했었다. 나와는 별개의 삶이라 여겼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며 외면했다. 공직자의 자세니, 금융인의 품격이니 하면서, 큰일 나는 척, 애써 엉뚱한 데만 힘주며 십수 년을 살아온 것이다.
기업을 평가하고, 힘을 실어주는 일을 업으로 하면서도, 실제로는 기업의 치열하고 생생한 현장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크게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잘못되면, CEO의 무능을 탓했다. 부모님에게도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이 얼마나 부끄럽고, 무지한 행보였단 말인가.
학교에서 경제학 원론, 경영학 원론, 재무론, 투자론, 윤리경영 교과서 공부하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교재 보고, 산업분석 찾아보며 페이퍼 워크(Paper Work) 위주로 업무에 임했으니, 비현실적일 수밖에. 좀 더 이른 때에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방앗간, 생선가게, 횟집, 학원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여러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쉽지만,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다.
그래도, 뒤늦게나마 각성(覺醒)하게 된 건 다행이다. 주변인들은 여전히 내가 부족하고, 아직 멀었다며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이 정도면 장족(長足)의 발전이라고 자평한다.
최근 4~5년간은 CEO들의 가지각색 사연에 귀 기울이고, 더 나은 기업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며, 관련분야 학위도 취득하는 등 조금 더 철이 든 기업금융 전문가로 살아왔다. 그러던 중 돌우물의 임 대표까지 만났다. 흔히들 말하는, 인생의 전환점,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난, 간접금융 시장, 즉, 기업금융(대출) 업무 이외에, 직접금융 시장, 즉, 투자업무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때부터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 부서를 모니터 했다. 회사 밖에서도, 틈나는 대로, 벤처투자사 대표, 사모펀드 대표, 투자유치에 성공한 기업가들을 만나고 인터뷰했다.
일찍이 전문 투자자로 변신한, 곧 경제적 자유를 성취할, 친구 G를 따라, 여러 기업을 대상으로, (비록 소액이긴 하지만) 직접 천사(!)의 역할도 해 보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투자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거다.
실제로, 내가 지금껏 과감하게 투자한 벤처회사들은 사라졌거나,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기대 이상의 실적으로 순항 중인 기업은 없다. 암 치료를 위한 신약을 개발 중인 바이오기업이 있어, 부디 성공하라고 틈날 때마다 기도 중인 게 전부다. 부끄럽지만, 정확히 어떤 분야에 특화된 회사인지도 잘 알지 못했다.
피 같은 돈도 큰 고민 없이, 직관(直觀)에 따라 덜컥 투자해 버렸으니, 내가 감히 투자의 영역을 어찌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으랴.
다행인지, 불행인지, 투자의 세계는 나만 잘 모르는 건 아닌 듯하다. 내가 수차례에 걸쳐 투자를 추천했던, I 기업에 대한 우리 회사 투자팀장의 답변은 단호한 NO였다.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인재인데도, 어떤 긍정적 답변도, 피드백도 없었다. 부정적인, 뻔한 회신뿐이었다.
경쟁기업이 많다, 기술력과 성장성이 한계가 있다, 메타-버스가 실제 돈이 될까 등등. 답신 어디에도 회사의 핵심기술, 중점 아이템, 미래 계획 등에 대한 궁금증, 후속 문의 같은 건 없었다.
그뿐만 아니다. 몇 년 전, 폐기물 처리와 자원순환 솔루션을 구축한 플랫폼 기업 E에 대한 투자를 추천했었다. 누구나 인정할법한 기술력을 보유했을뿐더러, 성장성도 높았고, 폐자원을 재가공해 해외에 수출까지 하는 기업이었다.
플랫폼(애플리케이션)을 업그레이드하고, 대규모 공장도 신축할 계획을 보유한지라, 투자금 확보의 타당성도 충분해 보였다. 대표이사의 기업가정신, 인성, 직원들의 평판도 훌륭했기에 자신감 있게 투자심사서를 작성했었다. 결론은 부결,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결과였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I 기업은 기술력, 성장성, 잠재력을 모두 인정받아, 저 멀리 떨어진, 경남 지역의 중견기업으로부터 무려 150억 원을 투자받는 데 성공했다. 낭중지추(囊中之錐), 뛰어난 능력은 어떻게든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렇게 되니, 최근엔 다른 유명 투자사들도 후속 투자를 하겠다며 뒤늦은 문의를 하는 모양이다. 버스는 이미 떠났다.
E 기업도, 얼마 전 여러 재무적 투자자로부터 200억 원 규모의 투자를 받는 데 성공했다. 특이한 건, 다른 투자사들의 투자 결정 소식을 전해 들은 우리 회사가 뒤늦게나마 공동 투자자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이다. 이런 경우는 만시지탄(晩時之歎),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라기엔 어색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 회사에 투자를 의뢰했다는 이유로, 난 기대치 않았던 포상금까지 받았으니, 투자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되면, 투자업무에 관한 한, 1차 검토자의 가치관, 역량, 관심사가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무언가 어색하다. 아무리 베테랑 투자전문가라 하더라도, 현재 떠오르는 유망산업의 사업 기회를 모두 알고 있을 리 만무하다. 추천 기업의 기술력을 속속들이 이해할 리도 없다. 세상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그렇다고, 모든 검토안마다 집단의사 결정을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중지(衆智)를 모은다 해도, 다수의 선택지(투자 대상 후보 기업) 중 최선을 선택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선입견, 편견이 개입할 수도, 특정인의 선호도가 강하게 반영될 수도 있는 일이다.
의사결정의 투명성, 공정성이 담보된다 해도,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단 하나의 결론을 내리는 일이다 보니, 결과의 정의를 예단하기는 어렵다. 공동책임은 무책임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더 많은 데이터가 쌓이게 되면, 인공지능(AI)이 알고리즘으로 최고의 투자처를 지정해 줄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직은, AI나 CHAT-GPT에 투자를 전적으로 위임하는 시대가 아니다. 나는 최근까지도 그날그날 주식의 종가(終價)를 예측해 주는 AI 기반 주식 플랫폼을 믿었다가, 낭패를 보았다.
내 눈에는 별다른 실체가 없어 보이는데도, 수십억, 수백억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아 투자받는 기업들도 부지기수다. 바이오기업이야, 아직 수익화되지 않은 초기 연구개발 투자비, 연구진의 역량과 스펙, 기술력, 특허권을 보유한 경우가 많기에, 매출액이 없고, 영업손실과 당기순손실이 크더라도, 미래 기업가치 산출과 그에 따른 투자의 타당성은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화려하게 포장된 사업계획, 지나치게 낙관적인 시장 전망, 실제보다 과장된 경영자의 역량과 스펙, 구태의연한 카르텔(학연/지연/혈연) 등의 영향으로 엉뚱한 곳에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경우도 많다. 내가 상식이 부족한 건지, 세상이 상식 밖인 건지 헷갈릴 정도다.
조금 안 좋게 보자면, 투자의 세계에는 정보의 불균형성(비대칭성)으로 인한 기회주의(한탕주의), 그리고,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남아 있는 듯하다. 실제, 창업 초기기업이 보유했다는 기술력, 대표를 비롯한 구성원들의 역량을 검증하기가 쉽지 않고, 눈 가리고 아웅, 정보가 부족한 상대방을 속이기도 쉽다.
최초 투자에 대한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리가 발현되어, 묻지 마 식 (후속) 투자로 이어지는 사례도 심심찮다. 여차하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내가 담당하던 기업 중 대기업들이 운영하는 온-오프라인 마트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마트 연합 플랫폼 전문기업 C가 있었다. C는 지역 내 소형 마트를 운영하는 점주들을 회원사로 가입시켜, 입출고되는 상품과 재고관리에 최적화된 시스템을 구축해 주고, 공동구매와 공동판매로 가격경쟁력을 높일 요량이었다. 그리하여 대기업 마트를 찾는 소비자들의 발걸음을 지역 마트로 되돌려 놓겠다는 취지였다. 투자의 명분은 충분했다.
C 기업이 IR(Investor Relations, 기업홍보) 활동을 통해 투자받은 총액은 무려 수백억 원에 달했다. 코로나 초기, 자금 유동성이 풍부한 때였던지라 프로젝트에 참여한 투자자의 수도 두 자리 숫자에 달했다. 투자는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확인한 C 기업의 플랫폼 시스템은 여전히 불안정했고, 가입 회원사도 소수에 불과했으며, 개발인력의 교체도 빈번했다. 수백억 원의 투자금을 유치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회사 대표가 우리 회사를 찾아 추가적인 자금, 그것도 상환의무가 있는 대출금을 요청한 것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초기 자본금에 투자금, 각종 대출금까지 투입해서 기업이 한 일은, 기술개발이 아닌, 지역 내 다수의 슈퍼마켓 인수가 전부였다. 고의는 아니었을지언정, 결과적으로는, 동네 슈퍼마켓이 기술(Tech) 전문기업으로 둔갑해, 자본주의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벤처투자자를 농락한 셈이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모양새다.
날고 긴다는 지성인들도 가끔은 이성을 잃고, 이렇게 엉뚱한 결과를 낸다. 아무리 눈먼 돈이라고 해도, 제 주인을 잘 찾아가지 못해, 이렇게 눈 뜨고 코 베인 결과로 이어지는 걸 보자니, 속상한 마음 달래기 어렵다.
워낙 다양한 분야의 기업들이 생겨나고, 성장했다가, 소멸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그중 옥석을 가리기가 참 쉽지 않다. 모집된 투자금의 성격, 주력 투자 산업, 기존 투자 이력도 중요하다. 딱 맞는 기업이, 때맞춰, 짠 나타나는 게 최선일 터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그러나, 기업의 운명(運命)이 운(運)에 온전히 기댈 수는 없는 일이다. 회사의 기술력, 사업 아이템의 성장 가능성이 충분한데도, 제때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약 없이 허송세월 보낼 수는 없다.
물론, 기업이 제보다 제삿밥에 더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 기업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효용, 만족감을 제공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요즘도 간혹, 특별한 비즈니스 모델도, 자기 자본 투자도 없이, 현란한 프레젠테이션(PPT)으로 투자자들을 현혹한 후, 급여와 복지만으로 투자금을 축내는, CEO라기보단, 사기꾼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이런 소식이 매스컴을 타게 되면, 기업과 기업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 퍼지고, 정작 투자가 절실한 전도유망한 기업마저 절호의 사업 기회를 놓칠 우려가 있다. 투자 시장이 왜곡되면, 우리가 사는 사회도 활력을 잃고, 퇴보하게 된다.
본연의 사업에서 경쟁력을 발휘하는 기업이어야, 외부 투자자로부터 선택받을 확률이 높다. 눈먼 돈이 넝쿨째 들어오는 행운 같은 건 애당초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기업 소개자료를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하는 일도, 원칙적으로 투자받기 위함이라기보다는, 회사의 어제와 오늘을 되돌아보고, 내일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회사설립 초기 단기적 운영자금은 납입 자본금, 그리고 CEO 개인 자금으로 최대한 조달해야 한다. 본인의 모든 것을 올-인(All-in) 하지 않는 기업가에게, 외부인 어느 누가 투자를 감행하겠는가. 설립 자본금, 정책금융을 다 투입한 후에도 사업이 정상궤도에 못 오르고, 자금이 부족하다면, 차라리 그즈음에서 사업을 중단하는 게 좋은 선택일 지도 모른다.
금전 피해를 최소화하고, 외부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원성도 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이 내 맘 같지 않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예상외일 때는, 냉정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CEO가 회사 성장에 대한 자신감이 있고, 기업 내외부 이해관계자의 응원이 이어지며, 거래처로부터 긍정적인 피드백이 늘어나는 경우, 투자와 사업확장을 적극 진행할 일이다. 그렇다고, CEO가 혼자서 결정할 일은 아니다. 외부의 컨설팅도 받아보고, 협력업체나 소비자의 피드백도 받아봐야 한다. 신중하게 검토하고, 부족하다면,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한다.
기왕 투자를 받기로 결정했다면, 조금 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본업에 방해되지 않는 수준에서, 가급적 많은 (예비) 투자자들과 미팅해야 한다. 정기적으로 기업 소개자료도 업데이트하고, 투자라운드에도 참여해야 한다. 단, 기업의 핵심경쟁력이나 주요 아이템, 기술력이 외부로 유출될 우려도 있으니, 여기저기 파일을 뿌리는 것은 금물이다.
노력하고, 때를 기다리면, 귀인(貴人)을 만나게 된다. 준비된 자에게는 기회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아파트를 팔려고 내놓아도, 정성을 다해야 팔릴까 말까다. 제아무리 비싼 아파트라도, 위치나 학군이 좋다 하더라도, 사려는 사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타인에게 선택받지 못한다면, 대궁전이라 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제대로 팔고 싶다면, 평소 청소도 깨끗이 하고, 필요하다면 수리도 하고, 정 안되면 돈 들여 인테리어도 새롭게 해야 한다. 반드시 이사 가야 한다면, 이런 노력에 더해, 다른 매물보다 더 낮은 가격에라도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팔린다. 매수 희망자의 마음에 들기 위한 갖가지 노력, 행동도 필요하다.
자산의 실체가 분명하고, 시세도 매겨진 아파트 투자(매매)도 이렇게 어려울지 언대, 당장 일 년 후의 생존 여부도 불투명한 기업이, 여차하면 단 한 푼도 돌려주지 못할 금액을, 제삼자로부터 조건 없이 받아내는 일이 오죽 어렵겠는가. 쉽게 투자하겠다는 자가 있다면, 오히려 의심해 볼 일이다. 쉽게 오면, 쉽게 사라진다.
한 기업이 설립된 후 5년 이상을 버틸 확률은 약 20%대, 그 와중에 미래 성장성을 인정받아 외부로부터 투자까지 받는 기업은, 5%도 되지 않을 것이다. 외부 투자금을 마중물 삼아 성장하고, 결과적으로 투자자에게 보상(기업 상장 또는 매각)까지 하게 되는 기업의 비중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1%가 안 된다.
기본적으로 기업경영, 기업투자의 영역은 높은 실패 확률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거의 무(0)에서 유(1)를 창조하는 일이다.
기업 I는 설립 후 불과 5년여 만에, 숱한 기술적 난관과 시행착오를 모두 극복하고, 킬러-아이템을 찾아내, 다수의 거래처로부터 기술성, 사업성을 인정받아 외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최적의 전략적 파트너 겸 투자자 H를 만나, 대도약의 전기를 마련했다. 거의 기적이다. I의 꾸준한 성장과 번영을 기원한다. 3년 내 기술특례 기업으로 무난히 코스닥시장에도 상장하기를 바란다.
수개월간, 옆에서 I의 성장과 투자유치 과정을 지켜보았다. 여전히 투자의 세계는 잘 모르겠다. 다만, 수학의 정석은 있어도, 투자의 정석이 없다는 건 알겠다. 투자는 과학이라기보다는, 도전, 의지, 기다림의 영역으로 해석하는 편이 맞다.
손바닥이 부딪쳐야 소리가 나듯이, 적합(Fit)한 파트너가 나타나야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그전까지는, 지나친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고, 본연의 사업에 집중하되, 틈나는 대로 파트너를 물색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양반 소리는 들을지언정, 거상(巨商) 되기는 어렵다. 목마른 자가 계속 찾아 나서야 한다.
IR 결과가 탐탁지 않더라도, 자존심 상할 필요는 없다. 그저 상대가 우리 회사에 부합하는 파트너가 아닐 뿐이다. K의 꿈이 실현되는 과정을 보아하니, 돌우물에도 조만간 귀인(貴人)이 나타날 것 같은 예감이다. 담금질의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뿐이다. 단, 밑도 끝도 없는 자만심은 금물이다.
꾸준히 도전하는 한, 꿈은 현실에 가까워진다. 그리하여 투자는 미지(未知)의 영역이라는 오늘의 내 선입견도, 결국엔 수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