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의 화제인 <세이노의 가르침>을 읽었다. 책을 읽었다기보단, 호되게 질책받은 느낌이다. 어쩜 그리도 직설적이고, 적나라한지, 조금 과장하자면 과거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기분마저 든다.
아무리 과거를 미화하려 해도, 나는 피보다 진하게 살지 못했다. 생의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 결과, 그처럼 마흔다섯에 경제적 자유를 맛보기는커녕, 여전히 부채의 덫에서 허덕거리는 일상을 살고 있다.
특별한 사정이 생기지 않는 이상,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맞이한다 해도, 그때까지 주택담보대출, 종합통장 대출 잔액을 전부 상환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스스로 썩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위해 봐야, 기실 빡빡한 삶을 영위하는 생활인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고, 과거에 매몰되어 오늘의 삶, 내일의 희망을 등한시한 채 살아갈 순 없다. 그때는 싱숭생숭 살았더라도, 앞으로는 조금 더 진하게 살아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드라마틱한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긴 어려운 운명일지도 모른다. 찢어지게 가난했다던 그 시대는 이미 역사가 된 지 오래다. 전쟁, 독재, 산업화를 모두 경험한 86 세대를 표준으로 삼기에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더구나, 지금의 MZ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더 가난한 최초의 세대라는 이야기가 상식으로 통용된다.
나의 이야기다. 가진 건 없어도, 내리사랑과 자녀 양육에 대한 책임감 있는 부모를 만나, 무난하게 정규교육받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피아노, 태권도, 미술, 컴퓨터 학원은 못 다녔지만, 그게 마음의 상처로 남지도, 독기를 품는 계기가 된 것도 아니다.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국어, 과학 과외를 받지 못했어도, 방과 후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옆자리의 천재(!) 선호, 원섭이에게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거나, 교무실에 계신 윤 선생님에게 여쭤보면서 부족한 면을 채워나갔다.
그렇게 12년 동안 개근한 후, 대학에 진학했다. 군대 다녀오고, 대학 졸업한 후, 공기업에 입사해 20년 이상 재직 중이다. 그사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 낳아 기르는 중이니, 기본 도리는 다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여느 장삼이사(張三李四)처럼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상처받기도 했으며, 결점도 있다.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는 마흔 이후에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고, 다른 이들에게 섣불리 충고, 조언, 비판, 비난하지 않는다.
죽을 듯 살 듯, 치열하게 살았다고 자부하진 못하더라도, 그럭저럭 살아온 것 같기도 했다. 세이노 선생님께 심하게 혼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유독, 적당한 우등생, 성실한 소시민, 구체적으로는 공무원/대기업/공기업 직장인을 평가절하하는 듯하다. SKY 대학 졸업장, 박사학위, 더 나아가서는 의사, 판검사, 변호사, 회계사 같은 전문직들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시야가 좁고, 잘난 척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데 게으르며, 활동범위가 좁아 큰 부자가 되기도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도 몇 가지 해당 사항이 있다 보니, 유독 이 대목에서 감정 동요가 심하다.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건, 사실 그가 팩트(!)로 폭행(!)하고 있단 반증이기도 하다. 특히, 도전에 대한 두려움, 그로 인한 기회 상실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사자후(獅子吼)는 불편한 진실이기도 하다.
세이노는 굳이 비교하자면, 정주영, 이병철 회장 스타일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입지전적인 기업가다. 해 보기는 해 봤어? 어디까지 내려가 봤어? 얼마만큼 노력해 봤어?라고 끊임없이 물어본다. 물론,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렇게까지 도전할 생각을 못 했거니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처럼 상위 0.1% 부자가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언감생심, 사실상 이번 생엔 불가능하다. 마음을 내려놓는 편이 정신건강에 더 좋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가 되려면, 사업을 해야 함은 기본값이다.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고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려면, 다른 경쟁자가 주지 못하는 특별한 효용감, 만족감을 제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 시행착오, 새로운 지식습득과 내재화가 일상화되어야 한다.
그는 70여 년간 치열한 삶, 선구자적인 인생을 살았다. 모르긴 몰라도, 안 해 본 일이 없고, 세상만사에 거의 통달했을 터.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를 쓴 유시민보다 한 수 위다. 통섭형 인재, 작가, 부자, 게다가 자유인. SKY대 박사학위만 없을 뿐이지, 그에게 적합한 만물박사 학위는 하늘 위(Above the SKY)에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1천억 대 부자가 된 그를 시기, 질투하거나, 그의 경제적 성공을 운(運)으로 폄훼할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세이노의 가르침>을 읽고도 그런 태도를 유지할 사람은 더욱 없을 테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이 모두 사업가가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다. 아니, 그래서도 안 된다. 가계, 기업, 정부라는 세 개의 축이 잘 유지되어야 세상이 돌아간다. 사업한다고 다들 집을 비우면, 집은 누가 지키고, 소는 누가 키우겠는가.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기업, 기업인을 우대하는 건 대찬성이다. 모름지기 자본주의는 혁신적인 기업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세상에 없던 제품, 예전보다 더 나은 서비스, 더 맛있는 음식, 오감(五感)을 즐겁게 하는 문화콘텐츠를 생산해 내는 기업가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주역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자본주의는 소수의 승자가 경제적 파이를 상당 부분 차지하는 구조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는 이상, 경쟁은 불가피하다. 협약, 전략적 제휴, 시너지 등 인간적 내음 나는 미사여구로 제아무리 포장해도, 사실상 기업 경영은 너 죽고, 나 살기의 영역이다.
직원들에게는 높은 급여와 복지를 제공하며, 세상 좋은 사장님 소리를 들을 순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경쟁기업 대표와 그 구성원들에겐 타도할 대상, 원수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직원들을 자르는, 구조조정 전문가 타이틀을 얻을 수도 있다.
모르긴 몰라도, 수천억 대 자산가가 되기까지, 그는 수많은 적을 상대하고, 실력껏 무찔렀을 가능성이 크다. 책 전반에 실린 위풍당당한 태도, 거침없는 자신감을 접하고 나니, 난 그가 정정당당 경쟁하고, 현행법을 준수하며, 오로지 제품과 서비스의 품질만으로 치부(致富: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됨) 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가 얼마 전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여느 정치인 관련 50억 퇴직금의 부조리함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보았다. 일흔을 넘은 나이에도 공정과 상식, 정의의 가치를 중시하는 점이 보기 좋았다.
그러나, 그가 치열하게 살아온 과정에서, 설령 고의는 없었더라도, 분명 누군가는 상처받고, 또 다른 누군가는 경제적인 손실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기대 이하의 사람에게는 여전히 대놓고 욕한다.
<세이노의 가르침>은 20~30대 청년, 사회초년생들을 위한 지침서다. 그중에서도, 남다른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 장사나 사업을 하고 싶은 사람, 일반적이지 않은 삶을 살고 싶은 도전자들을 주요 독자층으로 삼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렇게 믿어야, 나 같은 40대의 독자가, 뒤늦은 나이에 예고치 않은 회초리를 맞고 나서라도, 앞으로의 삶을 긍정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때는 틀렸다고 한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솔직히, 그간의 삶이 부족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어렸을 때야, 법과 제도, 관습을 잘 지키고, 공부까지 잘한다면, 칭찬받을 일뿐이다. 그러나, 성인의 삶이라면, 시키는 일 잘하고,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해도, 기껏 범생이 소리밖에 못 듣는다.
약속된 날짜를 한 번도 어김없이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에 취한 나머지, 마흔 중반이 넘도록, 회사에만 의존하며 살아왔음이 못내 아쉽다. 주식도, 부동산도, 사업도 위험하다는 위험 회피 전략은, 뒤집어 말하면, 아무 공부도 하지 않겠다는 자기 고백이나 다름없다. 무엇이든 계속 시도해야, 어떤 일이든 벌어질 것 아니겠는가.
큰 부자가 되지는 못할지언정, 그때와는 달리, 조금 더 가슴 뛰는 삶을 살기로 한다. 안전 지향성은 미덕(美德)이 아니다. 더 늦기 전에 특별한 사정을 만들어야 한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시도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걷고, 읽고, 쓰는 시간은 늘리되, 술과 커피는 줄이기로 한다. 몸과 맘의 건강, 그리고 통장의 잔고를 조금씩 높이기로 한다. 실질적인 목표는 대출금 줄이기다. 고금리 시대를 맞이한 기념으로, 빚은 평생 친구라는 오래된 신념은 버리기로 한다.
빚만 갚다가 노년을 맞이할 수는 없다. 내게도 부자가 될 방법은 있다. 그렇게 믿기로 한다. 수천만 원 투자한 비상장 기업의 성장을 돕기 위해, 틈날 때마다 아이디어를 고민해 제시하고, 선량한 관리자로서 의무도 다하기로 한다. 좋은 파트너도 소개해 주고, 후속 투자를 유치할 수 있도록 벤처투자사, 금융기관 다니는 친구, 선후배들과도 좋은 인연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림잡아 3년 후에는 엑시트(Exit, 주식매각 또는 주식상장)도 가능하겠지.
기왕이면, 소중한 사람들에겐 밥과 술 대신, 내가 쓴 책을 선물해 주는 게 좋을 듯하다. 읽고, 쓰기에 더 매진해야겠다. 또한, Say-no와는 달리,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한 언어의 온도를 유지하기로 한다. 긍정적인 언어(Say-yes)를 자주 써야 좋은 기운이 되돌아옴을 믿는다.
이제 와서 세이노처럼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늦은 시작도 아니다. 현실에 충실하되, 저마다의 특별한 사정 하나씩 만들어 보자. 피보다 진하게 사는 청춘은 아닐지언정, 피 한 방울 안 튀기며 살 수는 없다. 이제 변화의 발걸음을 뗄 시간이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