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선인도, 악인도 없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관람후기
금요일 저녁 퇴근 후 극장을 찾았다. 유독 심란한 한 주였기에 나에게 영화관람이라는 작은 선물로 기분 좋은 주말을 맞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출장을 마치고 집 근처 홍대입구역까지 오는 시간을 계산하고, 도착 즉시 관람할 수 있는 시간대에 상영하는 영화를 고른 결과, 딱 맞아떨어지는 선택지가 <콘크리트 유토피아>였다.
이미 장안의 화제였지만, 행여 극장에서 보게 될 수도 있단 생각에, 일부러 영화 줄거리나 세평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선입견이나 배경지식 없이 영화를 보게 되는 기쁨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날 저녁에 이 영화를 관람하려고 힘든 일주일을 보냈었나 보다.
내가 좋아하는 두 사람, 이병헌은 연기로 깔 수 없고, 이승철은 노래로 깔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생이지만,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말은, 이 베테랑 연기자에게 제격이 아닐 수 없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그의 연기를 칭찬하는 이야기가 워낙 많았던지라, 도대체 어떤 인물을, 어떻게 연기했는지 궁금했다. 더구나, 혼돈과 재난 이후의 세상, 비현실적인 서울의 모습을 그렸다고 하니, 거친 세상사 잠시 잊고, 편한 마음으로 그가 연기한 <김영탁>이라는 인물에 집중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주말을 행복하게 시작하게 되리라는 나의 기대감은 영화의 도입부에서부터 무너졌다. 러닝타임 2시간 내내 머리는 지끈거리고, 생각은 복잡해졌다. <김영탁>, <김민성>, <주명화> 등 주요 인물 3인방과 <김금애>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까지, 시종일관 나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미증유의 재난을 맞이한 상황에서, 당신이 만약 <황궁 아파트> 입주민이라면, 절체절명의 순간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누구의 편에 설 것인지, 그리고 당신은 어떤 인물과 가장 닮았는지 계속해서 질문한다.
대지진, 쓰나미, 뭐라 명명해도 크게 상관없는 대재앙을 맞이한 인류는 모든 것을 잃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아마겟돈, 혹은 세계의 종말과 같은 상황이다. 그 와중에도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주변부 오래된 아파트 딱 한 동만 쓰러지지 않은 셈이다.
대한민국에서 <아파트>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아파트>는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이다. 홀로 우뚝 솟은 <황궁 아파트>는 추운 겨울, 나와 가족을 지켜줄 보금자리 정도로 한계 지을 수 없다. 평생 일구어 온 재산의 총합이자, 자존심의 표상이다.
DNA에 깊숙이 새겨진 이기적 유전자를 기꺼이 내려놓고, 황궁 아파트 입주민들은 아파트 밖 헤아리기도 힘든 숫자의 <난민>을 통 크게 받아들일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 선택은 과연 새로운 희망일까, 아니면, 또 다른 지옥일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건 아파트 주민이나, 아파트 밖 난민이나 매한가지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구하는 <공리주의>가 최선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고, 매정하다. 곳간에서 인심이 나는 법이다. 당장, 나와 내 가족의 곳간이 비어가는데, 남 몫까지 챙기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연유로, 아파트 입주민들이 외부인의 아파트 출입을 막자고 결론 내린 것을 욕하기는 어렵다. 살 사람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세상을 무너뜨린 것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만인과 만인 간 투쟁이 시작될 우려가 생겼다. 때마침, 그들에겐 행여 발생할지도 모를 외부인과의 전투에서 선봉에 설 리더(김영탁)가 선출되었다. 엘리트 공무원 민성(박서준)의 주도로, 아파트 내 시스템을 재정비할 여력도 갖추었다. 이제 공은 영탁과 민성에게 넘어갔다.
이 혼돈 속에서도, 더불어(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는 명화(박보영)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우면서도, 왠지 비현실적이고, 이상주의적이다.
영탁은 무질서한 세상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시민(주민)들은 이 난세의 영웅에게 기꺼이 권력을 양도한다. 나와 가족의 안위를 위한 소시민의 생존전략이다.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영탁으로서도 손해 볼 것 없는 장사다.
자연 상태, 전쟁상태, 무정부 상태에서 싸움을 멈추고,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권력자에게 집중된 통치권이 필요하다. 영탁은 기꺼이 지팡이를 든 절대 군주, 리바이어던이 된다. 홉스가 말한 <사회계약설>이 떠오른다.
영탁은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 아파트 방범대원들을 이끌고 물이 말라버린 한강을 건너는 장면은, 흡사 모세의 기적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영탁의 극 중 실제 이름도 <모세 범>이다.
사실, 영탁은 가짜 아파트 입주민이었다. 무자격자가 권세를 손에 쥐고, 절대 권력을 행사하다 보니, 손쉽게 괴물이 되어버렸다.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감히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독재자가 되어야 했다. 걷잡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파트 주민들의 생존권 사수라는 대의명분하에, 영탁은 일사불란하게 조직을 지휘한다. 어느새 그의 추종자들은, 선악(善惡)을 구별할 이성을 상실했다. 식량이 동나자, 영탁을 위시한 방범대원들은, 이제 아파트 밖으로 나가, 약탈을 서슴지 않는다. 양심과 도덕도 배고픔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심지어 살인마저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고 만다. 개인은 집단의 익명성 안으로 숨어버린다.
과업의 성공여부에 군주(영탁)의 운명도 달려있다. 영웅으로 남거나, 일순간 모든 책임을 지는 죄인으로 전락하거나. 애석하게도 미션은 언젠가 실패하기 마련이다.
아파트 안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여인, 노인, 어린이, 이른바 노약자들도, 흉흉한 소문은 애써 외면한다. 차마, 일용할 양식을 확보해 돌아오는 영탁의 무리를 뿌리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개선장군(凱旋將軍)인 양 환영할 뿐이다.
영탁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도, 영화는 내내 영탁이 선을 넘고 있음을 알려준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는 법이다. 콤플렉스 군주의 마지막이 해피엔딩일 수는 없다.
사실, 영탁도 적당한 욕심과 이기심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이자, 한 가족의 가장일 따름이었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그를 이 자리까지 이끈 셈이다.
초유의 재난이야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자연의 선택이겠지만,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인 대중(주민)의 선택이 초래한 결과는 그들 스스로 감내할 몫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영탁은 남들이 멍석 깔아준 자리에 앉아 자기 깜냥껏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는 아파트 주민들에게 맛난 음식과 물, 그리고 불을 선물했다. 생존을 걱정하던 아파트 주민들에게 풍요를 선사한 것은, 다름 아닌 영탁이다.
영탁이 가짜 주민인 것을 알아차린 후, 그를 인민재판에 넘기려 한 명화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격이요(甘呑苦吐),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矛盾)이다.
외지 사람들도 우리의 이웃이랄 때는 언제고, 가짜 주민임이 확인되었다는 이유로, 혼신을 다해 자기를 지켜준 대표를 쫓아내려 하다니, 어쩐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격이다.
더구나 명화는 백의의 간호사다. 그녀는 혼란 초기 아픈 환자를 손수 돌보고, 아파트 밖 이웃도 기꺼이 품어줬다. 전장에서 간호사는 아군, 적군도 가리지 않는 게 기본원칙이다.
명화는, 제아무리 급박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인간성, 양심, 공동체 의식의 표본 아니었던가.
하지만, 더 이상 그녀를 응원하기도, 본받기도 어렵다. 영탁과 남편(민성)이 어렵사리 구해 온 배급은 기꺼이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고마움은 표한 적이 없다. 아파트 입주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각자가 응당 받아야 할 적정 배급량(1/n) 이상을 받아, 몰래 이웃에게 나눠 주고, 거기에서 도덕적 우월감과 뿌듯함을 느낀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파트 주민 누군가는, 제 몫을 덜 받기 때문이다.
명화는 그 점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애써 외면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그녀를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도 아깝지 않은 남편 민성(박서준)이, 생사를 건 투쟁 끝에 배급식량을 얻어 왔는데도, 명화는 굳이 그 용기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도리어, 밖에서 사람 죽이고 다니는 거면, 당장 그만두라고, 괴물만은 되지 말라며 훈수할 뿐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매번 공자님 같은 말씀이나 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아파트 밖 세상은 이미 아비규환이다. 적과 동지를 구분하기 어렵고, 자칫 방심했다간 목숨을 잃기 십상이다. 명화도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내 남편만큼은, 함께 하는 무리와는 달리, 조금 더 도덕적이고, 고상하기를 바라는 심정도 어느 정도는 알 듯하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어쨌거나 남의 목숨을 빼앗은 이력이 있는 영탁, 그리고, 민성은, 결국 자기 목숨을 잃는다. 아파트 부녀회장 금애도, 소중한 아들의 죽음으로 그간의 이기심과 욕심, 위선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건 명화다. 그녀는 신으로부터 구원받았다. 누구에게도 위해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못된 길로 빠져드는 남편(민성)을 가엽게 여기고, 이웃으로 위장한 영탁의 악랄한 실체를 온 천하에 드러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한 셈이니, 양심의 가책도 덜 느꼈을 터이다.
그러나, 대재앙을 맞이한 그 순간, 이미 신은 죽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인류의 죄를 씻어 내기 위한 신의 심판이었을지언정, 남은 자들이 신에게 의지하며 잘 살 수는 없다.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의 고통이어야, 디스토피아 이후의 삶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점 이외에는 잘못한 게 없는 어린아이는, 황궁 아파트 입주민이든 아니든 간에 생존 투쟁의 희생양이 될 수 없다.
만인은 평등하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민성도 아내 명화를 좀 더 챙겨주려 했을 뿐이다. 그는 본래, 위기의 상황에서 자기 안위 따위는 뒤로한 채, 민간인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 모범 공무원이었다. 이미 무너져버린 사회 시스템하에서까지 공명정대(公明正大),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업무처리를 기대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명화가 아파트 밖 이웃을 숨겨주려 했던 사실이 들통날 위기에 처하자, 민성은 행여라도 명화에게 화(禍)가 닥치지 않도록, 영탁에게 무릎을 꿇었다. 또한, 살인에 대한 죗값은 제 목숨으로 바쳤다.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내의 품에서 참회했다. 누가, 민성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리고, 명화는 정말 선인가.
영탁, 민성, 명화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선인도, 완벽한 악인도 존재하지 않음을 잘 알기에, 어떤 선택지 앞에서도 낯부끄러워지기는 매한가지다.
내가 가졌던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가족에게 버림받았을 때, 나의 노력이 고스란히 부정당했을 때, 나는 과연 영탁과는 달리, 자리와 돈에 욕심내지 않고, 이성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을까. 괴물이 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섣불리 답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민성에게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하기도, 명화의 행보를 응원하기도 쉽지 않다. 고백하건대, 민성만큼의 용기가 있는 것 같지도, 명화만큼의 신념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부디, 살아생전 <콘크리트 유토피아> 같은 최악의 상황이 도래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영탁은 물론이거니와, 민성이나 명화로도 빙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서울 주변부에 국민주택 규모의 아파트 한 채 마련하기 위해, 조금 이른 퇴직과 경제적 풍요로움을 위해, 아등바등 노력하고 여러모로 고민하는 내 모습이, 과한 욕심으로 폄훼되지만 않으면 괜찮겠다.
황궁 아파트가 한국식 천민자본주의를 대표한다면, 크게 할 말은 없다. 집은 가족의 보금자리이고, 사는(Buy) 게 아닌, 사는(Live) 것이라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괴물이 아닌 인간이 되라는 영화의 메시지를 이해했다 치더라도, 욕심 없는 척, 고귀한 척, 남다른 척 살 수는 없을 듯하다.
내 신체와 정신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한, 방사능 오염수로 인해 태평양 바다가 오염되지 않는 한, 핵전쟁이 발생하지 않는 한, 기후변화로 해수면이 육지로 범람하지 않는 한, 강도 8 이상의 지진으로 지축이 무너지지 않는 한, 기꺼이 <아파트> 밖으로 나가, 나와 내 가족들이 배불리 먹을 음식 정도는 마련해 돌아오는 위험을 무릅쓸 예정이다.
다행히,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세상은 아파트 안도, 밖도 아직은 살만하다.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은 세상인심도 여전하다. 우리 아파트에도 담장과 울타리는 없다. 누구든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하다. 무리 지어 다니는 방범대원도 없다. 모르는 사람에게 내 방을 내어 줄 수는 없겠지만, 지나가는 이웃과 간식 정도는 기꺼이 나눌 수 있다.
지난 한 주가 유난히 힘들었던 이유는, 나의 실수와 부족함을 깨닫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다. 그 사실을 잊기 위해 영화라는 '순간'에 몰입하려 했다. 그러나, 당초 기대와는 달리, 영탁, 민성, 명화에게 나를 투영하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황궁 아파트의 주민들을 지켜보면서, 다들 결점과 실수를 갖고 살아가는 인간군상임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사는 한, 실수는 불가피하다고, 어제보단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면 충분하다고,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너며 극장문을 나섰다. 이제, 나의 아파트로 들어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