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더 잘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정말 강렬했던 기억은 꽤 오래간다. 지금까지 겪은 특정 경험, 주로 업무의 기승전결 서사가 나에게 그러하다. 이전 직장 후임자에게 5년 전 이력까지 알려 준 적도 있다. 하지만 일과 관련된 정보와는 달리, 나는 사람에 대한 정보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이름을 들어도 얼굴이 떠오르지 않고, 얼굴을 봐도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가끔 보는 타 부서 사람의 헤어스타일이 바뀌면 긴가민가하고, 한두 번 봐서는 다음에 만났을 때 먼저 아는 척할 수 없다. 겨우 몇 번 스쳤는데 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면 감사하면서 존경스럽다.
사회 초년생일 때, 사람에 대한 정보력이 대단하신 분과 함께 근무했다. 그는 몇몇 사람이 모여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저긴 같은 대학교 동문 모임.’ 또는 ‘저들은 전에 같은 부서에서 일한 적이 있어.’라고 귀띔해 주었다. 사회생활의 내공이 쌓이면 나도 그런 직장인이 될 줄 알았는데 웬걸, 여전히 그런 종류의 흐름은 읽어낼 수 없다.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주요 정보들을 기억하는 능력은 자연스레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다 보는 사람의 취향을 기억하는 것도 쉽지 않다. 내 기억에 자신이 없으니, 자신 있게 대화 주제로 삼기도 어렵다.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상태로는 “전에 OOO에 관심이 있으셨죠?”라는 말을 선뜻 건넬 수 없다. 억지로 말을 꺼내더라도 빈약한 기억으로는 대화를 이어가기도, 진심 어린 공감을 하기도 힘들다. 곰곰이 생각하니 이 모든 것의 원인은 '타인에 대한 관심 부족'인가 보다. 한편으로는, 굳이 그럴 이유를 못 찾아서 에너지를 아끼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물론, 자주 대화를 나누거나 가깝다고 느끼는 사람에 대해서는 사회생활이 가능한 수준 이상으로 잘 기억할 수 있다.
어쩌면, 기억할 수 있는 정보의 총량이 정해져 있어서 어떤 정보는 기억의 우선순위에서 밀어두는 게 아닐까.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억지로 노력하기보다 잘 기억할 수 있는 분야에 한정된 기억 총량을 사용하기로 했다. 기억하지 못할 타인에 대한 정보는 그저 흘러가도록 놓아주고, 대신 잘 기억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그러다 보니 글감도 그렇게 저장된 기억으로부터 찾는다. 좋은 점은, 현재는 과거의 형태로 매일 전환되므로 일에서 오는 글감은 계속 쌓인다는 것이다.